문화·스포츠 문화

'서부전선'으로 감독 입문, 스타 작가 천성일

각본만으론 훌륭한 작품 안돼 스태프·배우와 함께 고뇌했죠



왼쪽부터 서부전선, 해적, 추노, 7급 공무원,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 원스 어폰 어 타임.

서른즈음 무턱대고 뛰어든 영화판, 17년간 기획·제작·각색 종횡무진

기존 틀에서 벗어난 시나리오로 영화·드라마서 잇따라 흥행 거둬


책임 무거운 감독은 생각 없었지만

서부전선 애착 커 연출까지 맡아 앞으로도 이야기는 계속 만들 것

천성일(44·사진)은 신인 감독이다. 올 추석 개봉한 영화 '서부전선'이 그의 입봉작. 하지만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그 이력이 참 화려하다. 충무로에서 '영화 밥'을 먹고 살아온 지 17여년, 영화 마케팅을 시작으로 기획·개발·제작·각본·각색까지 두루 섭렵했다. 작가로서는 꽤 이름도 날렸다. 403만 관객몰이에 성공한 영화 '7급 공무원(2009년)'과 시청률 30%를 넘은 드라마 '추노(2010)', 지난해 여름을 강타한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866만명)' 등이 대표작이다.

그런 그가 연출을 한다니 왠지 '드디어'라는 느낌이었다. 무수한 영화인들처럼 언젠가 내 영화를 만들겠다는 염원을 품고 먼 길을 돌아온 게 아닐까. 하지만 감독은 기자의 지레짐작에 고개를 저었다.

"'내 영화를 만들자'고 생각은 했지만 제 경우 그건 감독이 아니라 제작자였어요. 게다가 감독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역할이잖아요. 저는 그 무게를 감당 못할 것 같았고 굳이 감당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죠."

하지만 결국 감독이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서부전선'이라는 작품에 애착이 강했기 때문일 테다.

"초고가 나온 게 7년 전쯤인데 이상하게 계속 안 됐어요. 근데 묘하게 이 작품은 포기하기 싫더라구요. 다른 게 잘 안되면 이러다 좌초하겠구나 하는데 이건 시간이 갈수록 '이러다 내가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진해졌죠. 내심 제가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수많은 우연이 모여 운명이 되는 거라고 했던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비단 '서부전선'뿐 아니라 천 감독과 영화의 인연 자체도 비슷한 궤적을 걸어온 듯 보였다. 영화 일을 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청년이 우여곡절 끝에 지금 이 자리에 도착하게 된 여정은 그가 쓰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무턱대고 뛰어든 영화 판, "긴 시간 '변방의 북소리'만 울려댔죠"=그가 영화 일을 시작한 계기는 작고도 사소했다. "원래부터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에요. 영화를 보는 것은 좋았지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죠. 계기라면…… 군 제대하고 하릴없이 집에 있으니 누나가 너 영화 일 한 번 해보지 그러냐, 하더라구요."

스치는 한마디에 업계를 조사했더니 대우도 나쁘지 않고 유망한 듯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물리학을 전공했던 청년은 서른을 목전에 둔 나이에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오래지 않아 '나쁘지 않은 대우'와 '유망함'이 할리우드만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한국 영화판은 참 쉽지 않았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주위에 영화인이 많아서 뭘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게 없다 보니 당시 주류라 할 수 있는 굵직한 회사들은 못 가고 그 밑의, 밑의, 저 아래의 회사들을 전전했어요. 어떤 회사들이었느냐면 대부분이 제가 입사한 후 몇 달 만에 문을 닫았어요. 월급도 한 30만원?(웃음)"


그때의 기억은 그에게 사무실 짐을 최소화하는 묘한 버릇까지 남겼다. 짐이 많으면 회사가 망했을 때 힘드니깐. 그는 아직도 군대에서처럼 물자(?)를 적재·후송·파기·방치해 짐이 한 박스가 넘지 않도록 한다고 했다.

관련기사



그러던 어느 날 '어차피 회사가 아닌 작품으로 승부하는 세계인데 그냥 내가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동료들과 회사를 만들어 영화 기획·개발을 시작했다. 시나리오 작가도 섭외하고 투자도 받으러 여기저기 다녔다. 물론 이후로도 두세 번은 더 실패했지만.

"그렇게 시행착오를 하다 보니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도 작품은 개발해야겠고. 일단 시나리오 초고라도 하나 있으면 투자자들이 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글솜씨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이야기만 괜찮으면 전문가가 다시 만져주겠지 하면서."

◇영화·드라마 종횡무진 오가는 스타 작가의 탄생=시작은 그렇게 어설펐다. 시나리오는 지문과 대사로 이뤄진 글이라는 것만 알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법서 한 권 안보기는 했지만 어쨌든 꾸역꾸역 썼다.

하지만 정확하게 배우지 못한 것을 약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틀에서 더 자유로워지려 했다. 그는 "영화 '메멘토(2000)'가 그렇듯 평범한 이야기도 결말부터 시작하면 특별해진다"며 "이야기에 기승전결은 있어야겠지만 그 안에서는 순서를 바꾼다거나 중간이 여러 번 반복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변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첫 작품은 아쉽게 영화가 되지 못했지만 두 번째 '원스 어폰 어 타임(2008·156만명)'과 세 번째 '7급 공무원'이 잇따라 터졌다. 그리고 2010년, 드라마 '추노'가 신드롬적 인기를 끌었다. 천 감독이 영화판에 뛰어든 지 10년이 훌쩍 넘었을 때였다.

하지만 이후로 줄곧 승승장구했느냐면 그것은 또 아니다. 천 감독은 "해가 떴다 졌다 그랬죠." 라고 기억했다. 상황에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작가들에게는 마치 스포츠 선수에게 거는 것 같은 기대감이 부여돼요. 전작이 성공했으니 그만큼만 하자고. 하지만 작품에서 작가의 역할이란 정말 선 하나 긋는 거잖아요. 그 선을 바탕으로 연출이 하나의 면을 세우고 배우가 연기로 또 하나의 면을 세우면서 작품이 완성되는 거죠. 글 하나만으로 대단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최면을 걸죠."

◇연출 통해 협업이 주는 기쁨 깨달아=작가로서 이름을 떨쳤지만 감독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천 감독은 "감독과 작가는 정말 논리회로 자체를 새로 열어야 하는 전혀 다른 직업"이라고 말했다. 작가일 때는 몰랐던 미묘한 차이도 여러 번 느꼈다.

생경한 업무에다 부담과 책임감도 가득했지만 기쁜 일도 많았다. 감독은 "처음부터 혼자 고뇌하는 감독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야 했다면 겁 없이 뛰어들지도 못했겠죠. 훌륭한 스태프·배우들과 인디언들처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함께 풀어가려고 했어요. 그 협업은 정말 즐거웠죠."라고 말했다.

애착 가는 장면-감독은 배우 설경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마지막 장면을 꼽았다-을 무사히 영화에 담아낸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그럼 앞으로도 감독 천성일을 자주 볼 수 있는 걸까. 작가 천성일과 기획·제작자 천성일은 어떤 행보를 보일까.

"제게 확실한 것은 앞으로도 이야기는 계속 만들 거라는 거예요. 저는 지금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노트북을 꺼내 뭔가 이야기를 쓰고 있기는 하거든요. 그렇게 만든 이야기들이 드라마에 어울리면 PD님을 만날 테고 영화 같은 이야기다 싶으면 잘 찍어줄 감독님께 드리겠죠. 그러다가 제가 욕심이 생기는 이야기가 나오면 또 지금처럼 소심하게 '제가 한 번' 하면서 손을 들 수도 있겠죠. 그때 사람들이 회초리를 꺼낼지 축포를 터뜨려줄지는 모르겠네요.(웃음)"

He is…

△1971년 충청 △1990년 충북대학교 물리학과 △2000년 다큐멘터리 '평화의 시대' 프로듀서 △2006년 영화 '삼거리 극장' 기획 △2007년 영화 제작사 하리마오 픽쳐스 공동 설립 △2008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기획·각본 △2009년 영화 '7급 공무원' 제작·각본·단역 △2009년 영화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 제작·각본 △2010년 드라마 '추노' 각본 △2010년 드라마 '도망자 Plan.B' 각본 △2010년 3회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작가상 수상 △2010년 제46회 백상예술대상 (TV 극본상) △2012년 영화 '5백만 불의 사나이' 기획·제작·각본 △2012년 드라마 '7급 공무원' 각본 △2014년 영화 '해적 : 바다로 간 산적' 기획·제작·각본 △2015년 영화 '소수의견' 기획·제작·각색 △2015년 영화 '서부전선' 기획·각본·연출



·사진=송은석기자


김경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