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Culture & Life]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남북 소년소녀합창단 만들어 동질성 회복 앞장서고파"

한반도·세계 곳곳 누비며 노래하면 통일 넘어 지구촌 화합도 이뤄낼 것

연극영화과 출신으론 첫 방송사 PD SF드라마·라디오뮤지컬 등 히트시켜 도전 추구하는 '아이디어 뱅크' 명성


제주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파도 소리를 노래처럼 들었다. "웡이자랑(어서 자라) 웡이자랑/자랑자랑 잘도 잔다." 섬집 아기로 태어난 고학찬(67·사진) 예술의전당 사장은 자장가 같은 파도 소리만 있으면 혼자여도 서럽지 않았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 건물도 지어지지 않은 초등학교에 입학해 청보리밭과 용두암을 뛰어다니던 때도 매일같이 노래만 불렀다. 바람이 드세어 책이라도 펼칠라 치면 다 날아가버리니 노래밖에는 딱히 할 것도 없었다. 그중 유독 목청이 좋았던 그를 두고 동네 어른들은 "학찬이는 성악가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소년은 성악가도, 음악가도 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국내 최고의 무대로 꼽는 예술의전당 사장이 됐다. PD와 방송작가를 거쳐 예술기관장이 된 그는 베토벤을 떠올리게 하는, 자연스레 날리는 흰머리와 트레이드마크 같은 검정 차이니즈풍 재킷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띈다. "제가 예술가는 아닙니다만 예술가의 기질이 있었나 봅니다. 음악적 감수성도 좋았고요. 대광고 재학 시절에 성적 깨나 나온다는 학생들을 모은 '서울대반'에서 공부했지만 대학은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더니 많이들 놀라더군요. 지난 1966년에 입학한 동기로 노주현·조경환 등과 같은 반이었는데 대부분이 배우가 되려는 친구들이었고 나는 영화감독이 꿈이었죠. 연출을 하더라도 연기는 해봐야 하기 때문에 졸업작품인 30분짜리 단편영화에서 주인공으로도 뽑혔죠."


범상치 않았던 고 사장은 졸업하던 1970년 당시 동국대·중앙대·한양대의 연극영화과 출신을 통틀어 '제1호' 공중파 방송사 공채시험에 합격한 PD가 됐다. TBC방송사에 입사한 그는 기질과 감각을 발휘할 첫번째 기회를 만들었다. 라디오 드라마국에 배치된 '초짜' PD가 "SF 드라마로 '어린이 소년극장'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 그때만 해도 'SF'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라 "그 SF가 사이언스 픽션 혹은 스페이스 판타지라고도 한다…"고 제안에 대한 부연설명을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태어난 '손오공'은 지금으로 치면 '뽀로로'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어린이 드라마 분야에서 전례 없는 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분명 앞서가는 감각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와 같이 일했는데도 원고를 내가 썼어요. 라디오는 '블라인드 미디어(blind media)'라 청취자들이 소리를 듣고 상상력으로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걸 실현하려면 종전 라디오 드라마의 문법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던지라 실력 좋은 작가일수록 변화와 전환을 더 어려워했죠. 설명을 거듭하다 못해 내가 쓴다고 나섰죠. 또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사운드 이펙트(음향효과)'가 중요했습니다. 해설자가 '여의봉이 커지고 있습니다'라고 할 게 아니라 '웅웅웅' 효과음으로 커지는 느낌을 보일 듯 들려줘야 하는 거죠. 당시 음향은 오로지 자연음뿐이었는데 처음으로 전자음향을 사용한 것도 나였습니다. 청취자들에게는 재미를 드렸고 나는 방송국의 신임을 얻었죠."

이어 서수남·하청일 듀오가 주연한 라디오 뮤지컬 '유쾌한 샐러리맨'을 탄생시켰다. 뮤지컬에는 음악이 있어야 하는데 타자기와 결재 도장으로 리듬악기 소리를 만들어 사무실 분위기를 리드미컬하게 연출한 것 역시 그의 아이디어였다. 라디오 뮤지컬 역시 그의 시도가 국내 최초였고 또 히트했다. 당시 전국의 라디오방송 청취율 톱10에 그의 프로그램이 2개나 이름을 올렸다.

연속 홈런으로 TV 부문에 차출된 그는 MBC '웃으면 복이 와요'의 독주에 맞불을 놓을 TBC '좋았군 좋았어'를 맡게 됐다. 이번에는 '최초'로 동물을 TV에 출연시켰다. 개의 눈에 비친 인간사를 코믹하게 풀어낸 '말하는 개 브리카'였다. 이처럼 그는 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 뱅크'였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PD 시절 가장 보람 있었던 프로그램을 꼽으라면 황인용씨가 진행하고 장미희씨가 보조진행자로 있었던 '장수만세'입니다. 기구한 인생을 살았고 배울 점을 얘기하는 할아버지·할머니를 모시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당시 황금시간대에 편성돼 인기가 많았습니다. 아들은 죽고 며느리가 집을 팔고 도망가는 바람에 어린 손자와 장롱에서 살던 '신림동 장롱 할머니'는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드시고는 혼자 밝게 웃으셨죠. 상으로 받은 텔레비전은 전기가 안 들어와 볼 수 없다고 하자 당장 한국전력이 장롱에 전기를 넣어준 게 기억나네요. 지금은 어르신 프로그램을 주말 새벽시간에나 볼 수 있지만 고령화 사회가 진행될수록 다시금 '장수만세'의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합니다."

그의 다채로운 경험은 예술의전당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임명 초기만 해도 "소극장 운영 경험이 전부인 사람이 어떻게 예술의전당을 이끌겠는가"라는 지적과 함께 '코드 논란'이 시끄러웠다. 정작 고 사장은 "(예술의전당 사장 중에) 작은 소극장이라도 운영해본 사람이 있었나?"라고 받아치며 껄껄 웃고 말았지만. 고 사장은 서울 강남에 대형 공연장은 많지만 문화적 다양성이나 저렴한 향유 기회를 제공할 작은 극장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윤당아트홀'을 열었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가 세계 공연계를 이끌지만 그 옆에는 오프브로드웨이가, 그 전 단계로 오프오프브로드웨이, 오프오프오프브로드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사람들이 많죠."

현장형·실무형 리더인 고 사장은 넘치는 아이디어에 실행력을 겸비했다. 취임 후 예술로써 위로와 치유를 추구하는 '힐링 아카데미'와 품격 있는 노년을 위한 70세 이상의 노인 프로그램으로 '노블 회원제'를 시작했다. 새내기 PD 시절에 가곡 프로그램 '내 마음의 노래'를 맡았던 그는 예술의전당 사장에 취임하고는 '가곡 콘서트'를 제안했다. 따라부를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인 '가곡'이 소외되는 게 안타까워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되살리고 싶었다. 또한 동심을 담아 노래할 어린이들이 대중가요만 따라 부르는 게 속상해 '동요' 되찾기에도 나섰다. 다음달부터 우선 3주간 매주 토요일에 '예술의전당 동요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동요가 가졌던 소재적 한계를 넘고자 다양한 테마로 콘서트를 꾸몄다.

고 사장의 이 같은 노력의 배경에는 '노래'로 상징되는 문화의 힘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있다. 그는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을 되짚으며 "당시 '동질성' 회복이 강조됐는데 이를 위해서는 남북 문화교류가 전제돼야 한다"면서 "만약 DMZ 평화공원이 조성되면 거기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 '아리랑'을 부르지 않겠나"라고 되물었다.

그런 그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그래서 '남북한 소년소녀합창단'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이념도, 계산도 없습니다. 남북한 어린이들이 같은 음악을 부른다는 게 곧 동질성 회복의 전초거든요. 이 아이들은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한반도 곳곳을 누비며 노래할 수 있고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노래할 수도 있어요. 대한민국의 통일뿐 아니라 전세계의 화합도 이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정부뿐 아니라 북한의 동의·협력을 얻어내는 게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통일 대박론'과 함께 통일준비위원회도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통일로 가는 길은 문화로 주단을 깔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북통일이 경제적 지원이나 외교정책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문화로 동질성을 회복하지 않은 한 남북한의 협력 논의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 앞바다를 바라보던 소년의 눈은 문화에 뿌리를 둔 거대한 화합을 꿈꾸고 있었다.

"방송작가협회 같은 자생력있는 예술인 생태계 조성해야"


예술의전당 사장은 역대로 관료 출신들이 맡아왔다. 하지만 고학찬 사장은 고리타분한 관료와는 거리가 먼, 처음부터 방송·예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다. 그는 방송사 PD에 이어 방송작가로도 일했고 영상사업물 제작에도 관여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방송의 편성제작국장도 거쳤다. 그래서 아는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아 특히 체감할 수 있는 문화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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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심을 끈 '예술인 복지'에 관해서는 "누가 예술인인지 그 법적 지위를 구분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예술인에 대한 '인적 지원'으로 복지정책이 추진되다 보면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라며 "그것보다 작품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제작 지원'을 하는 것이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동시에 예술인들의 활동을 돕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예술계 종사자들이 자생할 수 있는 선순환 생태계 조성과 관련해 미국의 '배우조합' '작가조합' 등의 '길드'를 벤치마킹한 국내 '방송작가협회'의 사례를 소개했다. "'방송작가협회'는 저작권 분쟁이나 소송 등을 겪을 때는 '공동대응'하고 나이가 들어 현업 활동이 힘든 방송작가는 내부 '작가 육성 아카데미'의 교사 자격으로 인재 양성을 돕는 동시에 은퇴 후 재취업 효과를 유도합니다."

문화생태계 조성의 전제로 문화에 대한 저변 확대도 필수다. 클래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의 접근을 우선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고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영상화 사업'을 실천과제로 내걸고 '예술의전당 토요콘서트 실황 중계'에 이어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영상으로 제작했다. "예술의전당에서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하면 기간은 고작 3일입니다. 관람객은 5,000명에 불과하죠. 하지만 영상화할 경우 수십 배의 사람이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진짜' 문화활동이 아니라고요? 문화소외지역의 사람들이 영상으로 오페라를 본 다음 '죽기 전에 꼭 실제 공연을 봐야지'라고 결심하게 만드는 게 바로 순수예술을 위한 저변을 키우는 일입니다."

이뿐 아니다. 그는 국내 유일의 서예 특화 박물관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을 재정비하기로 하고 기획재정위의 예산 43억원을 기반으로 올 하반기 박물관 리노베이션을 앞두고 있다.

He is…

△1947년 제주

△1966년 서울 대광고

△1970년 한양대 문리대 영화과

△1970~1977년 TBC 동양방송 PD

△1977~1980년 방송작가 활동

△1982~1989년 뉴욕 KABS 편성제작 국장

△1994년 ㈜제일기획 Q채널 국장

△1995년 삼성영상사업단 방송본부 국장

△2009~2012년 윤당아트홀 관장

△2013년~ 예술의전당 사장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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