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10년 전인 1997년 12월3일 외환위기를 맞은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에 편입됐다. 구제금융 신청 후 4년이 채 안되는 지난 2001년 8월 IMF 관리체제에서 졸업했지만 우리 경제와 사회는 아직도 외환위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지 않다.
물론 지난 10년 동안 우리 기업은 빚더미를 청산했고 우리 금융은 내실을 다졌다. 수출은 무한 확대 행진을 계속하고 있고 원화가치는 거의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으며 올해는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2만달러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된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당시 단기채무의 3분의1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이 다달이 늘어 이제는 그 두 배인 2,619억달러(11월 말 현재)에 달해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하지만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학 교수 등은 ‘아시아 국가들의 무분별한 외환정책이야말로 또 다른 금융위기를 유발할 소지가 높다’고 경고한다. 그들은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 국가들이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너무 많은 외환보유액을 쌓아놓고 있으며 낮은 통화가치를 유지함으로써 투자와 소비보다는 수출에 치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의존도가 세계 다른 국가들보다 두 배나 높은 것은 결국 세계시장에서 수요가 급격하게 둔화될 때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약점이기도 하다. 필요 이상의 외환보유액이 자본의 활용도를 낮춰 궁극적으로 성장을 저해하고 자산버블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다.
재워둔 달러가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아준다고해도 생활수준까지 향상시키지는 못한다. 그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며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자제했던 2003년 이후 지난해까지 우리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세계 평균에 늘 미달했다. 한마디로 가계경제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IMF의 그늘이 아직 남아있는 셈이다.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지난 우리는 이제 ‘기업 IMF’가 아니라 ‘가계 IMF’를 걱정한다. 기업과 금융이 내실을 다지는 동안 우리는 잠재성장률의 하락과 함께 중산층의 몰락 즉 양극화의 대가를 치렀다.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실직자를 떠안은 가계는 그동안 빚을 키울 수밖에 없었으며 지난 9월말 현재로 가계 빚은 610조원을 넘어섰다.
아울러 1996년 전체 가구의 55.5%였던 소득중간층(평균소득의 70~150% 가구)은 지난해 43.7%로 그 비중이 줄어들었다. 또 상위 10% 가구의 실질소득을 하위 10%의 실질소득으로 나눈 10분위 배율은 10년 동안 7.0배에서 8.3배로 확대됐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5년 만에 384만명에서 577만명으로 늘었고 청년실업은 스스로 취업을 포기한 사람까지 포함해 120만명을 넘어섰다.
오죽하면 20대를 비정규직 평균 월급액에 빗대어 ‘88만원 세대’라고 부를까. 아직도 우리는 IMF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외형상 외환위기는 극복했으나 지난 10년 동안 개인의 사회생활에도 불안은 깊이 파고들었다. 미혼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배우자의 신용정보를 조회해 보겠다고 했고 중년부부의 이혼이 크게 늘어난 것은 갑작스러운 실직 등 경제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소비생활의 효용함수도 달라져 과거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망하는 브랜드가 바로 나의 선택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구두는 평범하게 신지만 가방은 반드시 명품을 사거나 평균수준의 가방에 만족하더라도 뮤지컬은 반드시 로열석에서 봐야 한다는 식으로 자신만의 영역에서 최고를 추구하는 선택적 소비양태가 보편화되고 있다. 이는 부자가 되지 못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무시와 외면까지 느껴야하는 불안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존심의 발로이며 소비생활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작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 10년이 지나는 동안 달러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으나 나라경제에도, 국민생활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는 19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내일의 희망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