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한 조각 800억, 쇠고기 한 근 9,000억. 실제 가격이다. 단위는 마르크. 1923년 독일의 모습이다. 1차대전 직전까지 20마르크였던 구두 한 켤레는 4조2,000억마르크를 줘야 겨우 샀다. 주정뱅이가 쌓아둔 빈 술병의 가치가 술값만큼 저축한 사람의 예금잔고보다 훨씬 높았을 정도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쟁과 패전, 가혹한 배상조건 탓이다. 1차대전 중 재정지출 증가분의 86.3%가 불태환 지폐발행으로 충당됐다. 돈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두 가지 빚덩이도 독일을 짓눌렀다. 전비조달을 위해 발행한 내국채 1,440억마르크 상환부담과 승전국에 내줘야 할 배상금 1,320억마르크를 감당해야 하는 독일의 선택은 통화증발. 돈을 마구 찍어내는 통에 전쟁 전까지 미화 1달러당 4.2마르크였던 환율이 1920년엔 50마르크, 1923년 11월15일에는 4조2,000만 마르크로 뛰었다. 지폐로 세금을 내고, 대출금이나 외상대금을 갚은 기업의 재무구조만 다소 나아졌을 뿐 독일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초인플레이션을 잡은 것은 새 돈인 렌텐마르크(Rentenmark). 토지와 산업시설을 담보로 발행된 새 돈을 1923년 11월20일 옛 지폐와 1대1조 마르크의 비율로 강제 교환하자 거짓말처럼 인플레가 없어졌다. 정부는 1차 발행분이 바닥났어도 통화증발 대신 재정지출과 공무원 수를 줄이고 세금을 올려 통화가치를 지켰다. 환율도 1달러 대 4.2렌텐마르크로 돌아와 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독일경제가 패전의 아픔에서 벗어난 것도 이때부터다. 오늘날 독일의 통화는 유로. 마르크화는 사라졌지만 ‘렌덴마르크의 기적’은 통화가치 안정과 건전재정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로 경제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