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라이프

1,200년 이어온 불심… 드넓게 펼쳐진 호수… 조선인가도 따라 선조의 숨결이

산과 호수의 고장, 일본 시가현

히에이산 정상엔 '엔랴쿠사' 웅장한 위용

절 안엔 꺼진적 없는 '불멸의 법등' 불밝혀

서울 크기 '비와호'에선 유람선 여행 제격

호숫가 따라 펼쳐진 드라이브 코스도 일품

비와호와 유람선의 모습. 아이들이 유람선 선착장 근처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히에이산의 깊은 산속 엔랴쿠사의 곤폰주도로 내려가는 길. 아래에 있는 것이 곤폰주도 건물이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우리가 불국사를 찾듯 엔랴쿠사
를 방문한다.

엔랴쿠사 경내에 있는 장보고기념비의 모습. 한일 우호 차원에서 지난 2002년 세웠다.

일본 중부의 시가현은 일본에서 유일하게 '산'과 '호수'가 함께 있는 지역이다. 간사이 지방의 중심지인 오사카에서 교토를 지나 좀 더 북쪽으로 가면 커다란 호수가 나온다. 비와호다. 담수호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크다. 비와호를 가운데 둔 현이 바로 시가현이다. 시가현은 일본 역사에서 한 번도 주역이었던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명 자체는 한국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교토의 정신적 배후지로서, 그리고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과 도쿄 등 간토 지방을 잇는 핵심 육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와호 서쪽에는 히에이산이 솟아 있다. 고대부터 일본의 영산(靈山)으로 숭배의 대상이 돼왔다. 교토를 한국의 경주라고 했을 때 남산 격인 것이 히에이산이다. 산과 호수라는, 일본에서는 흔히 동시에 느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곳이 시가현이다.

◇히에이산 엔랴쿠사=해발 848m의 히에이산은 그 자체로도 신비한 느낌을 주지만 특히 엔랴쿠사(延曆寺)가 있어 더 유명해졌다. 히에이산의 거의 정상 부근에 있는 엔랴쿠사로 가는 길을 쉽지 않다. 기자가 탄 차량은 8㎞의 드라이브웨이를 마치 곡예하듯 한참을 올라갔다. 절 입구에는 산기슭치고는 널따란 주차장이 있어 절의 규모를 느낄 수 있다. 차에서 내리면 갑자기 온도가 떨어짐을 느낀다. 이곳은 평지보다 5도 이상 기온이 낮다고 한다. 옷을 단단히 챙겨갈 필요가 있다.


엔랴쿠사의 기원은 7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이초라는 승려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수도를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엔랴쿠사의 핵심 건물인 곤폰주도(根本中堂)의 시작이다. 사이초는 이후 당나라에서 유학하기도 했는데 다시 엔랴쿠사로 돌아와 불교의 일본 내 토착화에 노력했다. 사이초 이래로 엔랴쿠사에서는 엔닌·에이사이·도겐·니치렌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일본의 중요한 종파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나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엔랴쿠사의 핵심은 곤폰주도다. 우리 식으로 하면 대웅전인 셈이다. 삼나무들과 사이초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들 사이를 지나 한참을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한 후에 사방이 움푹한 곳에 곤폰주도가 있다. 정면 9칸(37m)에 측면 6칸(23m)의 당당한 건물로 여기에 100m가 넘는 'ㄷ'자 회랑이 둘러쳐 있다. 절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은 788년 사이초가 불을 켠 후 1,000여년 동안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는 '불멸의 법등'이다. 내부 불당 앞에 타고 있는 기름등잔을 말한다. 곤폰주도를 방문했을 때 20여명의 신도들의 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엔랴쿠사가 일본인들의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다.

곤폰주도를 비롯해 현재의 엔랴쿠사 건물은 대부분 1642년도에 세워진 것이다. 처음 설립 직후부터 장대한 엔랴쿠사는 이후 승병이라는 무력을 보유하면서 교토의 정치에도 개입, 무소불위의 집단이 됐고 이는 기존 정치세력들과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16세기 전국시대 일본의 통일을 시도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절은 철저히 파괴되고 승려들을 학살됐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와 함께 일본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절도 복원되기 시작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비와호 유람선=일본에는 바다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비와호라는 호수도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호수다. 면적은 673㎢로 서울의 1.1배가량 된다. 모양이 악기 중의 하나인 '비파'와 비슷하다고 해서 비와호(비파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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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호를 보면 우선 놀라는 것은 그 깨끗함이다. 낚시를 하는 어른이나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주위에 공해물질을 배출할 대도시가 없는 이유도 있겠지만 일본인들의 관리 정도는 알아줄 만하다.

이 정도 되는 호수면 당연히 유람선이 있다. 비와호도 마찬가지다. '미시간'이라는 이름이 붙은 4층짜리 초대형 유람선이 운행 중이다. 최대 1시간30분의 운항시간에 요금도 어른기준으로 3,700엔(약 4만원)이나 되지만 지불한 돈 만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호숫가를 도는 드라이브 코스와 히에이산 등 인근 산들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탁월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호수치고는 너무 넓어 나중에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곳곳에 남아 있는 한반도 자취=시가현에는 한반도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많다. 이는 한반도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고 최근까지도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다. 우선 엔랴쿠사에 있는 장보고기념비가 유명하다. 사이초의 제자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쓴 엔닌은 당나라 유학 중에 도움을 받은 신라의 장보고를 흠모했고 이를 기록으로도 남겨놓았다. 엔닌 탄생 1,200주년을 맞아 한일 우호의 차원에서 지난 2002년 엔랴쿠사에 높이 4.2m의 장보고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앞면에 '청해진대사장보고비(淸海鎭大使 張保皐碑)'라고 새겨져 있어 방문하는 한국인을 뿌듯하게 한다.

시가현과 비와호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기는 통신사(조선통신사)와 관련해서다. 통신사는 교토를 거쳐 나고야ㆍ에도(도쿄)로 가면서 비와호 동쪽 강변을 거쳤는데 지금도 '조선인가도'를 비롯, 당시 통신사를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유적이 이 지역에 남아 있다. 통신사들이 귀국 후에 쓴 글이나 그림에도 비와호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서 외교관으로서 조선ㆍ일본 교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아메노모리 호슈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고향이 비와호 북쪽 끝자락에 있는 나가하마시 다카쓰키정이다. 최근 고대 한일 간 교류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면서 그의 생가는 기념관으로 꾸며졌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참고로 그의 무덤은 그가 조선과의 외교관 생활을 하다 88세로 운명한 대마도에 있다.

/시가현=글ㆍ사진


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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