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5일] 미라보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한 고율 관세와 수출을 통한 외자 획득. 중상주의(Mercantilism)의 개요다. 산업혁명기 영국은 물론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ㆍ일본까지 중상주의라는 틀로 경제를 키웠다. 오늘날 보호무역의 밑바탕에도 깔린 ‘중상주의’라는 용어를 퍼뜨린 사람은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지만 원작자는 따로 있다. 중농주의(Physiocracy)를 신봉했던 미라보 후작(Marquis de Mirabeau)이 주인공. 프랑스 귀족 출신이면서도 경제개혁을 주창한 인물이다. 미라보가 당초 꿈꿨던 길은 군인. 1715년 10월5일 태어나 13세에 군사학교에 입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등 두 차례의 실전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바른 말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전역(32세)하기까지 대위 계급에 머물렀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영지에 머물 때도 질시를 받았다. 권력의 집중을 경고한 저술 때문이다. 대신 지식인층에서는 환영 받았다. 인구와 부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책 ‘인간의 벗(1756년)’을 발표한 뒤부터는 ‘인간의 벗’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기득권층의 미움을 산 결정적인 계기는 1760년의 ‘조세론’ 발간. 지역별로 다른 세율의 통합과 국내 통행료 폐지, 징세업체 정리와 토지ㆍ개인소득에 대한 국가의 직접세 징수 주장을 ‘반체제적’이라고 판단한 고등법원은 그를 감옥에 가뒀다. ‘중상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선보인 것도 이 무렵이다. 경제학자 케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뒤 펴낸 ‘농업철학(1763년)’을 통해서다. 감시와 반감금 상태로 심신이 지쳐 프랑스혁명 발발 단 하루 전(1789년 7월13일)에 74세로 사망, 이루지 못했던 그의 숙원은 후대에 바로 풀렸다. 입법의회에서 세제와 토지제도 개혁을 주도한 혁명가 미라보 백작이 그의 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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