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관료 벽에 막혀 못다핀 민간 전문가

내부견제에 밀려 '얼굴마담' 전락<BR>이민호 기업호민관에 이어 국세청 납세보호관도 사의<BR>임용한 기관장 떠나면 입지 위축 소속 직원들 노골적 저항 다반사<BR>인사·예산등 조직 독립성 키우고 소통확대 위한 다양한 채널 필요


민간출신 공무원들이 잇따라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관료조직의 경직성과 폐쇄성' 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정부세종로 종합청사 공무원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고 있 다. /서울경제 DB

손꼽히는 민간 금융전문가로 일하다 현정부 초기 고위관료로 입성한 A씨. 그는 관직에 머무는 동안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참 많이도 속을 썩었다. 그의 밑에서 일하는 관료들은 뒤편에서 A씨를 욕하기에 바빴고 업무능력을 대놓고 폄훼했다. 그는 결국 재임 1년여 만에 자리를 물러났다. 관료사회를 개혁하고 민간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충실하게 반영하기 위해 등용한 민간 전문가들이 떠나가고 있다. 현정부가 표방하는 대중소기업 상생의 공정사회 작업을 최전선에서 수행해온 이민화 기업호민관이 16일 돌연 사퇴를 선언한 데 이어 17일에는 국세청의 '납세자 호민관' 격인 이지수 초대 납세자보호관(국장급)이 자리를 떠나겠다고 밝혔다. 직접적인 표출은 안 했지만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대부분 일치한다. 바로 관료사회의 높은 벽에 가로막힌 현실을 참지 못한 탓이다. CEO 출신 대통령이 관료개혁을 입이 닳도록 말하고 탁상행정과 철밥통을 깨기 위해 민간 전문가들을 영입하지만 관료사회 특유의 '그들만의 리그' 앞에서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이민화 호민관은 그나마 자신이 떠나는 이유를 밝히면서 관료사회에 직설적으로 쓴 소리를 한 경우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독립성 훼손'이라는 단어를 스무 차례 이상 언급하며 "기관 독립성에 심각한 위협이 있어 강하게 항의했지만 파견 직원들로 구성된 호민관실의 한계로 중소기업 실태조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호민관실이 통제를 받는 시점이 바로 제가 물러나는 때라고 생각해 사퇴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청와대에까지 여러 차례 독립성 훼손 문제를 항의했지만 결국 부정적인 답변만 들었다고 소개해 민간 출신이 관료사회의 벽을 넘어 소신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민간의 전문가들을 영입해 관료 사회의 체질을 바꿔 보려는 노력은 사실 10여년 전부터 시도돼 왔다. 때로는 대통령까지 나서 민간 전문가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기도 했다. 민간에서 잔뼈가 굵은 CEO 대통령이 들어선 현 정부에서는 더욱이 민간 전문가들을 통한 관료 사회의 수술에 의욕을 보여 왔다. 현 정부 초기만 해도 관료 사회 안에서 "대통령이 관료들은 싫어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였다. 민간 전문가들도 이런 분위기 앞에서 나름대로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들의 야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좌절로 바뀌고 만다. 민간 전문가 출신으로 공모를 통해 관료 사회에 몸을 담았던 B씨. 그는 참여정부와 현 정부를 걸쳐 경제 부처에서 일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관료 사회의 우수성을 얘기하면서도 사석에서는 "죽어라 공부하고 고시 패스해서 왜 저렇게 밖에 일하지 못하나"라는 말을 서슴없이 꺼낸다. 그의 발언에는 공무원들이 타성에 젖어 책상에서만 정책을 만들어내고, 경쟁자가 없다 보니 스스로의 업무에 대한 객관적 평가 장치가 거의 없는데 대한 아쉬움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하지만 그의 공무원 동료들이 B씨에 대해 평가하는 말은 뜻밖에도 전혀 딴판이다. 일부 동료들은 "자꾸만 튀려 한다"고 뒷전에서 그에 대한 고깝지 않은 발언을 하곤 했다. 결국 그는 현 정권 출범 이후 얼마 가지 않아 관료 사회를 떠났다. 17일 돌연 사의를 표명한 이지수 국세청 납세자 보호관. 납세자보호관은 백용호 전 청장이 지난해 납세자 권익보호를 위해 신설한 자리로 민간에 개방한 직위다. 납세자가 부당한 세무조사로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권리보호를 요청하면 청장이나 조사국장과 사전 협의 없이 세무조사 일시 중지, 조사반 교체, 직원 징계 등도 요구할 수 있다. 지난 9월 판사 출신 김앤장 변호사인 이 국장이 초대 보호관으로 선임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년 임기 중 1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만 두기로 했다. 표면적인 사임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 서대원 국세청 대변인은 "오래 전부터 건강상 이유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연말 국세청 인사를 앞두고 사임 시점을 선택했다는 것. 그러나 국세청 안팎에서는 민간 전문가로서 조직의 견제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자신을 뽑아준 백 전 청장이 떠나면서 국세청 업무를 견제하기 쉽지 않았던데다 폐쇄적인 조직의 특성상 업무를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국세청 고위직 출신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외부인사가 공무원 조직에서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데 개방형 자리는 대부분 내부 조직을 견제하거나 감시하는 자리라서 더욱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자신을 임용해준 기관장이 떠나면 극도로 입지가 위축되는 것도 문제다. 그는 "정작 데리고 일할 소속 직원들이 공무원이어서 견제와 저항이 심하다.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면 노골적으로 반대의견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갑작스럽게 사퇴를 선언한 이민화 호민관이 기자들에게 말한 부분도 그의 발언과 줄기를 같이 한다. 이 호민관은 "대ㆍ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위한 호민 인덱스가 완료 단계에서 외압에 의해 실시가 중단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호민 인덱스와 관련해 거듭되는 통제는 결국 더 이상 호민관실의 규제혁신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어렵게 관료 사회에 입성한 민간 전문가들이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치는 없을까. 관료 사회 안팎에서는 민간 전문가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명망 있는 외부 전문가를 기용한다 하더라도 그를 뒷받침할 조직과 제도가 없다면 '얼굴마담'에 그치고, 그나마 단명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인사와 예산의 독립성 보장은 물론, 민간과 관료 사회간의 소통의 길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을 확보하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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