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10월 17일] 누가 우산을 빼앗는가

얼마 전 미국에서 섬유업을 하다 10여년 만에 서울을 찾은 한 지인을 만난 적이 있다. 사업 파트너를 찾느라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다는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대뜸 “한국에 중소기업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고 내뱉었다. 그의 말인 즉 슨 자신이 만나본 사장들은 하나같이 기업을 계속 운영할지 말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중소기업을 홀대하는 분위기가 과거와 달리 훨씬 팽배해져 있다는 것이다. 비단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중소기업들은 하나같이 한계상황에 내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은행들은 갈수록 돈줄을 바짝 조이고 있는데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까지 확산되는 바람에 제품 판매나 원자재 수급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을 정도다. 일선 현장에서는 은행이든 거래처든 하도 사정을 하고 다니다 보니 무르팍이 다 닳아버렸다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사실 중소업계는 친기업 정책을 표방한 새 정부 출범을 맞아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물론 대기업 위주의 정책에 대한 한 가닥 의구심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기대감은 이제 서서히 절망으로 바뀌고 있으며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갖는 소외감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사업조정제도 역시 중소업계의 힘을 빼게 만드는 단적인 사례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밥그릇을 빼앗지 못하도록 마련된 사업조정제도는 이미 곳곳에 허점을 드러낸 채 빈 껍데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국내에서 원자재를 독점 생산해온 K사의 경우 최근 완제품시장까지 진출해 말썽을 빚고 있다. 이 회사에서 줄곧 원재료를 공급 받아 제품을 판매해왔던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원재료를 공급 받는 대기업과 같은 시장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니 한마디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이다. 뿐만 아니다. 청소기나 디지털 도어록, 자동차 정비소, 재생타이어, 두부, 어육연제품 등 대기업의 진출분야는 영역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퍼져 있다. 한마디로 돈이 된다 싶으면 구멍가게까지 진출하는 몰염치한 모습마저 연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원자재 수입이나 완제품시장에서 독과점적인 지위를 행사해온 대기업들이 원자재 가공시장과 유통시장에 진출하면 막대한 자금력과 영업력을 무기로 삼아 해당업종을 장악하기 때문에 중소기업으로서는 아예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 중소기업 고유업종이 폐지된 후 문닫은 업체만 이미 100여개사를 훨씬 웃돌고 있을 정도다. 이런 와중에 주요 대기업들이 올 들어 사상 최대의 영업실적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은 가뜩이나 상처 입은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 인천남동공단에서 15년째 부품업에 매달려온 한 중소기업의 사장은 “예전에는 대기업이 이익의 50%를 하청업체에 내려줬다면 지금은 20%로 줄어들었다”면서 “과거에 비해 훨씬 쪼그라든 몫을 여러 명이 나눠먹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정책당국도 이른바 시장경쟁주의를 내세워 이 같은 문제점을 애써 외면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행여 잘나가는 대기업에 쓸데없는 피해라도 줄까 봐 염려하는 기색까지 느껴진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하지만 뉴욕 월가의 위기에서 보듯이 시장만능주의의 맹점은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고 봐야 한다. 대기업의 시장 진입규제 완화가 오히려 시장실패의 결과를 초래했다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이웃 일본의 경우 분야조정법이나 상조법 등을 통해 중소기업의 경영에 현저하게 악영향을 미칠 경우 대기업에 대해 사업규모 축소나 사업시기 조정명령 등을 내리고 이를 위반하면 무거운 벌금까지 매기고 있다. 정부는 이제라도 중소기업이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사업조정 유예기간을 확대하는 등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대기업도 상생의 정신을 발휘해 중소기업의 영역이나 넘보는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이제 누군가는 나서 중소기업인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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