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20일] 조반니 메디치


면죄부와 성공회, 위그노(프랑스 신교도) 학살. 중세 이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종교적 사건에는 가문 하나가 나온다. 메디치 가문이다. 면죄부를 판 교황 레오 10세, 영국왕 헨리 8세와의 갈등으로 영국국교회(성공회) 분리의 빌미를 제공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 집안 출신이다. 프랑스 왕실로 시집간 카트린 드 메디치는 신교도 7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교사한 주인공이다. 메디치의 영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등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지성들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연구과 저작활동을 펼쳤다. 갈릴레이 갈릴레오도 마찬가지다. 정치를 지배하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한 메디치 가문의 시작은 조반니 메디치(Giovanni de Medici). 1360년 2월20일, 피렌체에서 소규모 모직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르네상스 최대의 금융제국, 메디치 가문을 일궈낸 인물이다. 조반니의 성공 비결은 선택과 집중. 작은 모직공장을 물려받은 그는 모직산업의 호황을 바탕으로 은행업에 진출했다. 선발은행들이 영국과 프랑스간 백년전쟁에 휘말려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자금난을 겪을 때 교황에게 접근해 전속은행 계약을 따내고 유럽 전역에 지점을 깔았다. 조반니 사망(1429년)시 은행 지점은 16개에 이르렀다. 말년의 조반니는 사업을 아들에게 넘기고 문화예술 지원과 자선사업에 매달렸다. 조반니가 일군 상업자본은 정치권력으로 이어져 메디치 가문은 18세기 중반까지 피렌체를 다스렸다. 교황만 3명을 배출했다. 메디치 가의 자손이 끊어졌을 때 피렌체는 자선과 기부를 기억하며 비탄에 잠겼다고 전해진다. 조반니가 건립한 고아원이 아직도 피렌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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