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리빙 앤 조이] "좋은 시는 한번 보면 가슴에 새겨져요"

■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시' 펴낸 시인 최영미<br>중고등학교 때 독서가 평생 감성·지식의 2/3<br>동양시에 비해 감정 표현 구체적인 서양시가 더 좋아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지시고, 평원에서 바람을 풀어줍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가득가득 하도록 명해주시옵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녘의 낮을 주시어, 무르익는 것을 재촉하시고 무거워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늦가을 어슴푸레한 새벽녘 광화문을 걸으며 발 밑에서 부서지는 은행잎의 바스락거림에도 귀를 쫑긋하던 소녀.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래서 남들보다 생각이 더 깊었던 그 소녀는 일요일 아침이면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들고 차분한 발걸음을 옮기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을 읊조리곤 했다. 소녀는 커서 소설가이자 시인이 됐고 등단 후 1994년 낸 첫 시집이 밀리언셀러에 오르면서 한국 문단을 놀라게 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펴냄)의 시인 최영미(48ㆍ사진) 씨다.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건 초등학교 때 알았어요. 최우수상은 아니지만 글짓기 대회에 참가하면 늘 상을 받았어요. 독서를 워낙 좋아해서 일요일이면 사직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구요. 엄마는 학교 공부하러 가는 줄 깜빡 속았죠. 근데 가방에 교과서는 없고 대신 영어사전, 옥편, 도시락만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도서관을 다니면서 읽었던 책이 평생의 감성과 지식의 3분의 2를 채운 것 같아요.” 틈만 나면 도서관을 다녔던 그는 사직도서관과 정독도서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직도서관 수위 아저씨가 ‘그렇게 읽고도 학생이 또 빌려갈 책이 있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3일에 한권씩 1년에 100권이상 책을 읽었던 그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기록한 독후감 공책은 이제 보물이 됐다. 최근 출간한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시’(해냄 펴냄) 역시 그의 보물 창고에서 발견한 보석들이다. 시를 쓰는 것과 다른 사람이 쓴 시를 고르는 작업의 차이를 묻자 그는 “시에 대한 해석과 평가의 공정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고 작가의 생연대나 철자가 혹시 틀릴까 노심초사할 정도로 시선집 내는 과정이 더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어린시절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글을 보면서 옛날 시에 대한 열정을 만나 애틋했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200여편의 시를 쓰는 동안 지치기도 했는데 시선집을 엮으면서 그때의 뜨거운 가슴을 되찾은 기분”이라고도 했다. 책은 시집으로는 드물게 발간 한달 만에 5,000권이 나갈 만큼 인기다. 좋은 시를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갈증 해소해줄만한 시를 엄선한 것이 성공비결이라는 게 출판사측 설명이다.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과를 공부한 그에게 미술과 역사 그리고 문학의 공통점은 바로 이야기에 있었다. “미술 작품이나 역사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에 얽힌 이야기예요. 미술 작품은 한 장면이지만 그림 속 등장인물의 옷가지와 배경, 색상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한가지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소설이나 시도 마찬가지지요. 소설은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텍스트 위주라면 시는 현장감을 운율에 맞춰 간결하게 상황을 꿰뚫는 맛이 있죠.” 보통 시인은 소설의 문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소설가 역시 시의 문법을 관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달랐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출간 이후 10년 만에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랜덤하우스 펴냄)를 냈다. 1960년대부터 2004년까지 한 가족의 삶의 궤적을 딸인 하경의 입을 통해 서술하는 이 소설은 한국전쟁 이후 격변하는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들 이야기다. 대부분의 작품이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하듯 이 소설 역시 작가의 개인사가 투영됐다. “시를 쓰기 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탓에 한국전쟁에 관심이 많았죠. 한때 이웃이었던,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참상이 전쟁 후 개인과 가족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료수집을 하면서 더 자세히 알게 됐어요.” 그는 이번 시선집에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주술적인 시를 비롯해 워즈워드ㆍ셰익스피어ㆍ바이런ㆍ예이츠ㆍ니체 등 서양 대가들의 시와 정약용ㆍ한용운ㆍ김소월ㆍ김기림ㆍ천상명 등 우리의 시, 그리고 중국ㆍ일본ㆍ인도 등 동양의 시를 포함해 55편을 엄선했다. 각 시마다 그의 짧은 평을 함께 실었다. 그는 시선집에 들어있는 서양의 시와 동양의 시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했다. “동양시는 개인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서양시는 아주 구체적이죠. 우리는 사대부들이 대부분 시를 즐겨 쓰다 보니 연애 감정은 천하다고 여겨 남아있는 시가 드물어요. 개인적으로는 욕망에 충실하고 묘사가 구체적인 서양시를 더 좋아해요.” 시선집에는 문인 작품이 아니지만 눈길을 끄는 시가 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인 김운기 대위가 쓴 ‘백마고지’. 최씨가 소설 ‘흉터와 무늬’를 쓰기 위해 자료수집차 용산 전쟁기념관 자료실에 들렀다 발견한 시다. 시를 통해 작가는 한국전쟁을 다룬 어떤 영화보다 전쟁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진다는 소감을 곁들였다. 시인이 생각하는 좋은 시는 어떤 것일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좋은 시는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아요. 딱 한번 봐도 자꾸 생각이 나고 언어가 절제돼 있으면서도 이미지가 선명한 시가 바로 좋은 시죠. 잘 외워지지 않는다면 그건 좋은 시가 아니예요. 또 짧으면서도 운율이 있어야 읽는 맛이 있죠. 좋은 시는 눈이 번쩍하는 깨달음을 주고 지성도 자극하며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하죠.” 선명한 이미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김기림 시인의 ‘길’ 첫 문장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러져 돌아갔다’를 예로 들었다. 결코 밝지 않은 시인의 소년시절 상황을 딱 한문장으로 표현하면서도 눈부신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것. 처음 시를 읽는 사람 혹은 시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을 위한 시인의 충고도 덧붙였다. “안목이 중요해요. 안목은 저절로 키워지는데 조건이 있죠. 다른 사람의 작품, 특히 좋은 작품을 많이 읽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자신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안목이 생기게 되죠. 미술도 마찬가지죠. 피카소 그림만 본 사람이 피카소를 좋아한다면 신뢰가 떨어지겠죠. 일단 많이 보고 아는 게 중요해요. 안목은 그 다음 생기는 거죠.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예술작품을 보는 높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어요.” 부엌 창문을 열면 나무가 보이는 곳에 살고 싶다는 꿈을 꾸던 그는 2007년 춘천으로 이사했다. 뒤늦게 챙겨본 드라마 ‘겨울연가’가 그의 결단을 재촉했다고 한다. “2005년 일본에 갔는데 일본 작가들의 대화 주제가 겨울연가였어요. 돌아와서 비디오를 빌려 봤더니 혼절할 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더군요.” 그는 햇빛이 내리쬐는 정남향 아파트에서 따스한 온기를 받으며 내년에 초고 완성을 목표로 다시 소설 쓰기에 몰입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감각을 타고난 그는 짧은 글(시)을 잠시 한 켠에 밀어두고 긴 글(소설)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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