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11월 19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요즘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다. 수험생이 있는 집에 "애, 대학 어떻게 됐어요?", 대학 졸업반 학생이 있는 집에 "취직 어디에 됐어요?" 라고 묻다가는 눈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한술 더 떠 "우리 애는 S대에서 연락 왔어. 우리 애는 S전자에 들어 갔는데… 그 집은 어떻게 됐어?"라는 말을 했다가는 수십년 우정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러다 보니 가까운 친구나 친척, 회사 동료 사이에서도 아이들 근황을 묻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해보고 싶은 것들 맘껏 누리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 중 하나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어제 치러졌다. 아직 대학입시가 다 끝난 게 아니지만 대학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관문을 지난 만큼 무거운 짐 하나는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다행히 시험을 잘 본 학생도 있을 테고 평소 실력조차 제대로 발휘 하지 못한 학생도 있을 것이다. 시험을 잘 본 학생들은 하늘을 나는 기분일 것이다. 시험을 못 본 학생들은 희망의 불빛이 모두 꺼진 것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두께가 조금만 쌓여도 알 수 있다. 오늘 남들보다 한 발 앞서거나 뒤처진 게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좌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생을 살면서 도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시험을 잘 본 아이는 마음껏 축하해주자. 시험을 망친 아이에게는 어깨 한번 툭 쳐주며 "괜찮아"라는 격려의 말 한마디하자. 아이에게 결과를 따지지 말자. 시인 장석주는 '대추 한 알'이라는 시에서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라고 노래했다. 조그만 대추 하나가 익기 위해서도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오늘 겪는 좌절이 내일 열리는 열매의 씨앗이 된다면 견딜 만하지 않은가. 지금은 인생의 큰 고개를 하나 넘은 만큼 다시 쳇바퀴 돌리는 생활(대학에 진학하든, 재수를 하든, 취업을 하든)을 시작하기 전까지 짧은 휴가를 아이들에게 주자. '인간'이 아닌 '수험생'으로 살아온 데 대한 보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것,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몇 개라도 해보라고 권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몇 년 전 상영된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ㆍ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에서 주인공 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이 죽음을 앞두고 암병동에서 우연히 만나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하나씩 실천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영화가 상영된 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할 음식'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등 각종 버킷 리스트가 쏟아졌고 이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그래, 세상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 미래 먼저 재단 말아야 사실 정말 해보고 싶은 것들 대부분은 실천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3일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잠만 자기, 수험생을 둔 죄로 제대로 숨도 크게 못 쉰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하기, 동해 일출보기, 서해 낙조보기, 단풍구경 가기, 땅끝마을 가보기, 소설ㆍ시ㆍ철학 책 속에 빠지기, 각종 강연회나 봉사모임 나가기 등 생각나는 대로 적어 가능한 것부터 해볼 수 있다. 무엇을 해도 좋지만 젊음을 낭비하지 않고 건강하게 놀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여유를 가져라. 노는 시간을 가져라.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가져라. 남에게 주는 시간을 만들어라." 이것은 아일랜드 부모들이 성인이 되는 아이들에게 해주는 충고의 말이다. 어느 보험사 광고 카피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쓰는 잣대로 아이들의 미래를 재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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