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어! 포탄이 터지네…시노프해전




1853년 11월 30일 오후 1시 흑해 항구 시노프. 오스만 튀르크의 전략 요충인 이곳에 11척의 러시아 함대가 들이닥쳤다. 목표는 오스만 함대. 전사에는 전투가 여섯 시간 동안 진행됐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한 시간 만에 끝났다. 러시아군의 압승.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오스만 해군의 12척 함선 중 11척을 침몰시키고 해안포대까지 해치웠다.

러시아를 동방의 안정을 해치는 침략자로 규정하고 오스만 제국을 도우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전투 결과에 경악했다. 러시아 함대의 대형전함들에 탑재된 함포가 모두 772문으로, 중소형함 위주인 오스만 함대의 함포수 426문보다 많다고 해도 짧은 시간에 일방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신문은 이 해전의 결과를 ‘시노프 학살(Massacre of Sinop)’이라고 불렀다. 그럴만했다. 러시아군 37명이 죽고 233명이 부상당한 데 비해 오스만 사상자는 3,000명에 이르렀으니까. 함대사령관인 오스만 파샤 조차 다리 부상을 입은 채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혔다.

러시아 해군의 압승 비결은 혁신. 새로 도입한 작렬탄(炸裂彈) 덕분에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 작렬탄은 이전의 쇠구슬 포탄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대포에 장약된 화약의 폭발력으로 발사돼 운동 에너지만으로 적함을 부수던 쇠구슬과 달리 작렬탄은 운동 에너지는 물론이고 자체 폭발력까지 지녀 선체를 부수고 그 파편으로 인명까지 해쳤다.


프랑스에서 개발된 작렬탄이 실전에서 처음 사용된 사례인 시노프 해전은 작은 규모의 해전이었으나 역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 각국은 앞다퉈 작렬탄을 도입하고 목재 선박으로는 작렬탄의 파괴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전함에 쇠를 둘렀다. 범선 군함 시대의 종말도 앞당겼다. 오스만 해군 함정 중에서 시노프항을 유일하게 탈출해 이틀 뒤 이스탄불에 패전 소식을 알린 함정이 소형 증기 프리깃함이었다는 점을 중시한 점도 동력의 증기화를 자극해 세계는 증기 기관으로 움직이는 강철 전함의 시대로 들어섰다.

관련기사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 관계도 이때부터 다져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경찰’을 자처하던 러시아의 동진과 남하에 두려움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백년전쟁 이래 북미와 인도의 패권,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두고 싸웠던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연이은 전쟁에서 굳어진 불구대천의 원수가 공동의 적 러시아를 두고 뭉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하는 국제구도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크리미아전쟁에서 패배해 흑해를 통한 대양 진출이 막힌 러시아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중앙아시아 전문가인 영국의 고(故) 피터 홉커크는 역작 ‘그레이트 게임(1992)’을 통해 ‘지중해 진출이 막힌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서 60여년간 영국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봤다. 부동항을 향한 러시아의 관심은 시베리아 개발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요새화로도 이어져 구한말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장 극적인 반향이 나타난 곳은 당사자인 오스만 제국. 시노프 해전으로 격앙된 오스만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전선을 넓혔다. 3년간 지속된 크리미아전쟁은 한때 유럽을 휩쓸 것 같았던 오스만 제국이 종이호랑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국가의 힘이 쇠잔해지는 와중에도 오스만의 술탄들은 호화로운 궁전을 짓고 외국제 물품을 들여오는 데 열중해 종국에는 터키 혁명을 맞아 무너지고 말았다. 시노프 해전에서 작렬하는 포탄은 오스만 멸망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무능한 지도층의 부패는 언제나 ‘망국’이라는 이름의 같은 결과를 낳는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