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국내 패션업계에 놀라운 뉴스 두 가지가 전해졌다. 하나는 일본 의류브랜드 유니클로가 패션업계 최초로 국내 상륙 10년 만에 연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는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다음 날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이건희 회장의 차녀 이서현씨가 입사 13년 만에 삼성물산 패션 부문 사장이 됐다는 보도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승승장구하는 유니클로 소식은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과 함께 '우리 기업들은 뭐하고 있나'라는 서글픔을 안겨줬다면 이 사장이 패션사업 전면에 나섰다는 뉴스는 '드디어 삼성 패션이 뭔가를 보여주겠구나'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뒤집어보면 대한민국 패션업계가 그만큼 엄혹한 시기를 겪고 있고 이를 구원해줄 '영웅'을 갈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합리적 가격과 적당한 품질로 무장한 유니클로를 비롯해 자라·H&M 등 글로벌 SPA(제조·유통 일괄)브랜드의 파상공세로 어정쩡한 가격대의 국내 캐주얼과 여성복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고 사업을 접는 업체들이 속출했다. 패션협회에 따르면 최근 2~3년간 시장에서 사라진 국내 브랜드는 매년 40~50개에 달한다. 여기에 해외직구 및 온라인쇼핑 활성화로 수입의류가 마구 쏟아지며 우리 업체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특히 올 들어서는 디올·버버리·라펠라 등 글로벌 명품이 입을 맞춘 듯 한국 시장을 잡아먹겠다고 대놓고 공언하는 등 그야말로 패션 안마당은 해외 브랜드의 놀이터가 돼버렸다.
국가대표 패션 대기업인 삼성물산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K패션의 구심점 역할을 바랐지만 주력인 캐주얼과 정장의 부진, 변방에 머물고 있는 아웃도어, 막대한 투자에 비해 좀처럼 성과가 나지 않는 토종 SPA 에잇세컨즈 등으로 인해 3·4분기 250억원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누적적자를 내며 위기감이 팽배하다.
혹자는 이런 상황에서 이 사장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게 아니냐고 말꼬리를 잡는다. 이 사장이 줄곧 삼성물산 패션 부문(옛 제일모직)에 몸담고 있었고 직전에도 패션 부문 경영기획담당 사장이었는데 특별히 달라질 게 있겠냐는 지적이다. 특히 이 사장이 직접 기획한 저가의 에잇세컨즈가 삼성의 고급 이미지와 맞지 않아 정체성이 모호한데다 론칭 4년이 됐는데도 '돈 먹는 하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휘봉을 잡았다고 해서 삼성패션의 환골탈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 사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실적 부진을 이 사장과 결부 짓는 시선은 물론 이 사장의 책임경영에 대한 의구심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동안 전문경영인들이 주도적으로 회사를 이끌었고 이 사장은 아이 넷을 낳고 키우느라 사업 전반을 일일이 들여다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전언이다. 아울러 이 사장이 그간 실용주의를 근간으로 삼성 개조에 나선 오빠 이재용 부회장과 따뜻한 리더십을 통해 호텔신라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언니 이부진 사장에 비해 소극적 행보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디자이너라는 전문성과 누구보다 인간미 넘치는 품성을 갖춘 만큼 머지않은 시기에 삼성가의 DNA를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새로움과 변화에 주저하지 않고 디지털과 정보기술(IT)에 관심이 높아 지금이야말로 '이서현식 혁신'을 통해 뉴 삼성패션을 이끌 적임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5세기 초 잔다르크는 "프랑스를 지켜라. 왜 망설이느냐?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라는 천사장 미카엘의 계시를 듣고 전장에 나가 영국군에게 대패해 풍전등화였던 프랑스를 구원하는 기적을 보여줬고 결국 프랑스가 10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 우리 패션계 역시 100년 전쟁 못지않게 글로벌 브랜드와 생사를 건 10년 전쟁을 펼쳤고 어느덧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이 사장이 구국의 마음으로 위기를 헤치고 삼성패션, 나아가 대한민국 패션계의 잔다르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홍준석 생활산업부장 jsho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