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임진각


파천 반대를 부르짖던 신하도 궁궐 호위를 맡은 갑사도 달아나 따르는 사람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난가던 1592년 음력 4월30일의 모습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이날 새벽부터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파주에서 저녁을 먹다가 한양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밤중에 다시 짐을 쌌지만 깜깜한 그믐날 폭우까지 겹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항복은 과거 이이가 이곳에 화석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런 때를 대비해 매일 기름칠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화석정에 불을 지르니 비로소 사위가 드러났고 선조 일행은 화광의 도움을 받아 나룻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

예로부터 임진강을 건너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하류 쪽은 양안이 수직 절벽인 경우가 많아 정해진 곳에서만 도강이 가능했다. 선조가 건넌 곳도 남쪽 임진나루에서 북쪽 동파나루로 가는 외길이었다. 선조는 1년여 뒤 환도하면서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충신들의 넋을 달랬다. 이때 선조는 '천우신조로 이 나루로 돌아올 수 있었다(臨津)'고 생각해 강 이름을 신지강(神智江)에서 임진강(臨津江)으로 바꿨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6·25 때는 1만명이 넘는 사람이 이곳을 한꺼번에 건너기도 했다. 1953년 8월3일 휴전협정 이후 1만2,773명에 달하는 한국군 포로는 이곳에 놓인 784m짜리 가설교를 이용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왔다. 지금 임진각에 있는 83m짜리 '자유의 다리'는 가설교가 유실된 뒤 만들어진 관광용이다.

경기도가 임진각 일대를 우리나라의 대표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2018년까지 379억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쟁탈의 요소로 격전을 치러냈고 고려 때는 원나라의 침공을 막아냈다. 조선 때는 국왕의 파천을 지켜보고 6·25 때는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기도 했다. 역사의 현장이 오롯이 감동의 서사시로 부활하기를 기대한다.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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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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