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9일, 프랑스 파리 오페라코미크 극장. 이탈리아와 서독·헝가리·일본·미국·아르헨티나 등 15개국 시민들이 모여 ‘슬로푸드(Slow Food) 선언문’을 채택했다. 슬로푸드란 지역의 전통적인 식생활 문화와 식재료ㆍ음식을 일컫는 총칭. 패스트푸드와 대립적인 개념이다.
일부 유럽 국가에 머물던 슬로푸드에 대한 관심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전환점인 슬로푸드 선언문은 이런 내용을 담았다. ‘산업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속도의 노예가 됐으며 호모 사피엔스의 소멸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대안은 슬로푸드에 있다.’
슬로푸드 운동의 출발지는 이탈리아. 음식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로마에 맥도날드 햄버거가 진출한 1980년부터 시작한 반(反)인스턴트 음식 집회와 모임이 슬로푸드 운동으로 커졌다. 정크푸드가 아토피성 질환과 비만은 물론 집중력결핍장애(ADHD)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웰빙식과 슬로푸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유럽의 전유물이었던 슬로푸드는 확산을 거듭한 끝에서 각국에서 유기농 식단화, 외국산 식재료 반입규제 강화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각급 학교의 급식이 유기농 식단으로 바뀌고 전통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데에도 국제 슬로푸드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슬로푸드 운동은 환경보호ㆍ공정무역 운동과의 연계 등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반론도 없지 않다. ‘슬로푸드 운동은 기술발전과 세계화를 부인하는 좌파의 그릇된 식도락이 결합된 변종일 뿐’이라는 비판이 다국적 식품회사들로부터 나온다. 무엇이 맞을까. 확언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슬로푸드 선언 26년을 지나며 15개였던 회원국이 한국을 포함해 150개국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슬로푸드의 가능성은 절반이다. 세계에 통할 만한 김치와 된장을 비롯해 발효식품과 비빔밥ㆍ불고기 등 전통음식과 식문화를 가졌지만 ‘빨리 빨리’ 습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탓이다.
세상이 변하며 슬로푸드의 새로운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저성장의 고착화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 속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차적 욕구인 먹거리에 환호하고 이른바 ‘먹방(먹는 방송)’이 대세로 굳어지는 마당. 단순한 슬로푸드를 떠나 직접 땀 흘려 먹거리를 아껴서 먹는 습관이 확산된다면 섭생부터 시작해 매사에 감사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세월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윌든 호숫가에서 나는 제철 음식을 보약이라고 찬양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살기는 어렵겠지만./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