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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Art·Nature 첫글자 따서 건축
설경과 어우러진 설치미술·조각품 장관
페이퍼갤러리·스톤가든은 또 다른 매력
순백으로 덧칠한 1400년 고찰 구룡사
거북이 연꽃·구룡의 형상 위엄도 일품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서 볼 수 있는 저승이 이런 모습일까?"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 '간츠펠트' 속으로 들어간 일행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불과 3~4분 전만 해도 어느 누구도 관객이 미술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우리는 간츠펠트라는 작품이 그저 벽에 걸려 있는 액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기자 일행은 천장·벽·바닥의 구분이 없는 몽환적인 공간 안에 들어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숨을 죽였던 사람들이 입을 열고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미술 작품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에 위치한 '뮤지엄 산(SAN)'은 사계절 변화하는 대자연의 품에서 문화와 예술을 체감할 수 있는 전원형 뮤지엄을 표방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라는 것만으로도 이곳이 앞으로 원주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임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산(SAN)'이라는 이름도 건축(Space)과 예술(Art), 자연(Nature)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 함박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미술관을 하얗게 착색한 소담스러운 눈송이들이 안도 다다오의 진면목을 가린 것인지, 아니면 운치를 더한 것인지 기자는 알 길이 없었다. 쏟아지는 눈을 피해 성채처럼 축조한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코메티를 만난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홍보담당 직원 이영훈씨의 설명을 들으며 따라가는 '페이퍼갤러리'와 '청조갤러리'의 순례가 시작됐다. '페이퍼갤러리'의 전신인 한솔종이박물관은 지난 1997년 국내 최초의 종이전문박물관으로 시작했다. 페이퍼갤러리에는 원주의 종이 산업과 관련한 콘텐츠들을 전시해놓은 반면 '청조갤러리'에서는 다양한 회화작품과 판화·드로잉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뮤지엄 산의 본관을 나오면 신라 시대 고분을 모티브로 만든 '스톤가든'이 나오는데 총 9개의 스톤마운드들이 진을 치고 있고 뮤지엄 산이 끝나는 곳에 제임스 터렐관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터렐의 대표작품인 '스카이 스페이스' '디비젼' '호라이즌룸' '간츠펠트' '웨지워크'를 만나 볼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오로지 빛과 공간으로 빚어낸 작품들이다.
특히 앞서 언급한 작품 간츠펠트는 193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인 볼프강 메츠거가 시각 자극을 박탈했을 때 환각을 보는 현상을 규명하고 이를 '간츠펠트 효과(Ganzfeld effect)'라고 이름 붙인 데서 유래했다. 독일어 'ganzfeld'란 영어로는 'total field', 우리말로 하면 '전체 시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전체 시야를 차단해 어떠한 시각 자극도 입력되지 않도록 하면 뇌는 내부에서 거짓 신호를 만들어 절대적인 감각 박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데서 착안해 만든 작품이다.
이영훈씨의 설명을 듣자 '터렐이 수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아티스트'라는 인쇄물의 소개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목소리만 내면서 소통을 외면하고 있는데 현대미술은 이미 장르 간 벽을 허물고 이종 간 소통을 하고 있었다.
뮤지엄 산을 나와 원주시내로 가는 길은 그 사이 더 쏟아진 눈으로 순백의 세상이었다. 가느다란 침엽조차도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땅을 향해 내려뜨렸고 나뭇가지가 가리키고 있는 대지는 온통 새하얀 설국(雪國)이었다.
설경의 유혹을 못 이겨 도로에 차를 세우고 숲 쪽으로 다가서자 눈은 발목까지 빠져들었다. 스패츠(각반)를 하지 않은 탓에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등산화 안으로 눈이 들어왔고 체온에 녹은 눈은 물이 돼 양말을 적셨다.
원주의 서쪽 문막에서 차에 오른 기자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말리며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룡사로 향했다. 신라 문무왕 8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구룡사로 향하는 길은 다져진 눈으로 다시 한 번 포장돼 있었다. 기자가 탄 사륜구동차량은 아스팔트 위의 눈길을 엉금엉금 기어서 매표소를 지나 간신히 구룡사에 도착했다.
동행한 해설사 목익상씨는 "1,400년 고찰 구룡사는 1,000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영험한 아홉 바다의 구룡을 풀어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라고 설명했다. 승지의 영험함 덕분인지 서울을 떠나올 때부터 쉬지 않고 퍼붓던 눈발이 그치고 겨우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송림으로 둘러싸인 구룡사 경내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이층 누각 보광루의 규모만으로도 사찰의 영화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구룡사는 눈을 덮어쓴 채 치악의 자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원주를 찾은 날 현대 설치미술에서 1,400년 전 고찰까지, 눈이 과분한 호강을 한 탓인지 몸에 한기가 돌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서자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고열에 몸살이 시작되면서 밤은 쉽사리 지나가지 않았다. /글·사진(원주)=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