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과 아이작 뉴턴, 핑크 와인과 네모 선장의 보물창고, 원자력 잠수함까지. 난집합같이 들리지만 이들에게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다. 뭘까. 비고만(Vigo Bay) 해전이다.
직계 혈통이 끊어진 스페인 왕실의 후계구도를 놓고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에서도 전쟁을 치러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꼽히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초기인 1702년 10월 초. 네덜란드 출신 윌리엄 3세를 왕위에 앉힌 명예혁명으로 찰떡궁합을 이뤘던 영국-네덜란드 연합함대에 첩보가 들어왔다. ‘비고항에 보물선단이 정박 상태’.
연합함대는 10월23일 여명을 틈타 스페인 북부 비고만을 짓이겨 들어갔다. 결과는 압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긁어온 금은보화의 호송선단인 프랑스 함대 15척과 스페인의 대형 보물선 3척, 상선 13척이 나포당하거나 불에 타 가라앉았다. 영국 함대는 얼마나 약탈했을까. 10만~100만파운드라는 설이 분분하지만 일부나마 정확한 기록은 과학자에서 왕립 조폐국장으로 변신한 뉴턴이 남겼다. 약탈한 금과 은 4,512파운드를 넘겨받은 뉴턴 조폐국장은 기쁨에 들떠 1703년 ‘VIGO’라는 부조가 선명하게 새겨진 5기니짜리 금화를 만들었다.
비고만 해전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전체의 승패도 갈랐다. 약탈을 피해 자침을 택한 스페인 보물선에 실려 있던 금이 군자금 용도였기 때문이다. 육지의 전투에서도 영국군 사령관 존 처칠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연승을 기록, 낮은 신분에 머물러 있던 가문을 영국 최고의 공작가문의 일으켜 세웠다. 영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의 반열의 오른 존 처칠의 9대손이 2차대전시 영국 수상이자 ‘2차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원스턴 처칠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2,400여년 전에 ’필로톤네스소스 전쟁사’에서 강조한 대로 ‘전쟁의 승리는 약탈된 자본이 아니라 축적된 자본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읊었던가. 비고만 해전의 승패는 두고 두고 참전국들의 흥망에 영향을 끼쳤다.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금과 은을 잃은 스페인은 더더욱 약해지고 약탈한 금은 자본으로 축적한 영국은 번영의 길을 달렸다. 유럽 한 복판의 드넓은 땅에 지중해와 대서양의 풍부한 어족 자원을 보유한 프랑스는 축적된 자본의 힘으로 강대국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스페인 함대가 비고만에서 상실한 금과 은은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영감을 자극해 소설 ‘해저 2만리(1869)’의 소재로도 쓰였다. 상상 속의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선장 네모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비고만을 찾아 영국함대의 약탈을 피해 자침(自沈)을 택했던 스페인 보물선에서 금을 찾아 썼다.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원자력 동력 잠수함의 원조로 미국이 1955년 건조한 잠수함의 함명 ‘노틸러스’는 쥘 베른의 소설에서 나왔다.
프랑스-스페인 연합의 편에 섰던 포르투갈은 비고만 해전 이후 영국 편으로 돌아서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으로 꼽히는 메수엔 조약(1703)을 맺었다. 포르투갈 특산품인 핑크 와인도 이 협정에 따른 비교 우위 확보 노력에서 태어났다.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는 메수엔 조약을 포르투갈 쇠망의 원인으로 꼽았지만 영국은 자유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며 세계로 뻗어나갔다. 군사적·경제적 승리에 대한 도취감이 유전 인자를 타고 전해지는 탓일까. 근대 이후 주요 전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앵글로 색슨의 호전성은 여전한 것 같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