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금수저와 저커버그

미국선 기부경쟁 치열해지는데 우리는 오히려 세금폭탄 안기니

'위대한 딸바보' 나올 수 있겠나



아들 키우는 재미는 딸 키우는 기쁨에 한참 뒤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아들 두 놈과 지내면서 얻는 즐거움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특히 둘째가 딸 역할을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로 싹싹해서 '무딸'의 허전함을 잊고 지내왔다. 그런데 요즘 부쩍 딸 가진 부모가 부럽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 탓이다. 얼마나 딸을 얻은 기쁨이 크길래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했나 생각하니 그렇다.

"모든 부모들처럼 네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자라기를 바란다. 이는 너를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 모든 어린이를 위한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다." 저크버그가 이달 초 페이스북을 통해 딸 맥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페이스북 지분 99%, 450억달러(약 52조원) 상당을 생전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아들이 아니라 딸이어서 통큰 기부 결심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들을 얻었어도 똑같은 결정을 했지 싶다. 그렇더라도 말로만 듣던 '딸바보'의 전형을 보는 듯해 딸 없는 아빠 입장에서 샘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딸바보' 저커버그보다 진짜 부러운 게 따로 있다. 갓 서른 넘은 젊은이까지 선뜻 금수저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나서는 미국의 기부문화다. 미국 기업의 불문율인 아낌없는 기부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유산으로 전해진다. 카네기는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돈인 2,500만달러를 출연해 사회공헌에 앞장섰다. 이후 '성공한 기업가는 번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전통이 뿌리내렸다고 한다. 지금도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등을 거쳐 저커버그로 이어지고 있다. 빌 게이츠 부부는 죽기 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기부하자는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 캠페인을 전개 중이다. 미국에서는 당장 저커버그의 기부가 촉매가 돼 사회공헌 경쟁이 달아오를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새로운 기부를 이끌어내고 기존 기부왕 집안의 경쟁이 더해져 '아름다운 전염'으로 번질 거라는 얘기다.

우리는 어떤가. 기부는커녕 자녀들에게 대를 이어 금수저를 물려주려다 결국 낭패를 보는 사회 지도층 인사를 수없이 봐왔다. 요즘 같은 연말이면 이런저런 기부 소식이 전해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회사 돈으로 생색내는 경우가 상당수다. 그렇다고 개인이나 기업들의 인색함과 꼼수만 나무랄 수 있을까. 기부를 장려하기보다는 세금 거두는 데 골몰하는 당국의 인식은 어떤가. 소득세법 개정으로 지난해부터 기부자에 대한 세금혜택을 줄였다가 비판이 일자 다시 법을 바꿔 기부자의 세액공제를 확대했는데 그마저도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이달 2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에 따르면 고액 기부금 기준은 3,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아지고 세액공제율은 25%에서 30%로 높아졌다. 이는 미국의 전액 소득공제, 프랑스의 공제율 75%와 비교할 때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최근 논란이 된 황필상씨의 경우를 보자. 2002년 평생 모은 재산을 모교에 내놓은 황씨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면 기부할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는 지난달 세무서로부터 기부한 돈 215억원보다 많은 225억원의 증여세를 내라는 독촉장을 받았다고 한다. 기부금을 관리하는 장학재단에 관여한 것을 문제 삼아 세금 폭탄을 안긴 것이다.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와 봐야겠지만 그 결과에 상관없이 황씨의 고통은 한국 기부문화의 현주소를 짐작하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금수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심을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괴롭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저커버그가 한국에서 기부를 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그려진다. 이러니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금수저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누가 나서겠는가. '차라리 기부한 것을 모두 되돌리고 싶다'는 한 기부자의 한숨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임석훈 논설위원 sh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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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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