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년간 네 차례의 전쟁, 사상자 3,200만명. 원한과 증오, 복수가 거듭된 세월을 지나온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에게 이를 갈았다. 두 나라의 대결이 본격화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 허울 뿐인 신성로마제국의 깃발 아래 33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분열됐던 독일의 국가들은 17세기 말까지 프랑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는 이런 구도가 깨졌다. 프러시아가 프랑스의 목줄을 죄기 시작한 것. 엘바섬을 탈출해 다시금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이 치른 최후의 싸움인 워털루 전투의 승패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보다는 마지막 순간에 전장에 밀고 들어온 프러시아군에 의해 갈렸다.
프로이센의 영도력으로 성장과 통일을 이룬 독일이 1870년 보불(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간 뒤 프랑스인들은 이를 갈았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지나며 독일과 프랑스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20세기 중반을 넘기고 서독의 주권이 회복(1955년)되고도 프랑스는 용서하지 못했으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났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 궁에서 전격적으로 상호협조조약을 맺은 것이다. 통상 엘리제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의 골자는 세 가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ㆍ국방ㆍ교육ㆍ문화 등 전분야의 협력을 강화하며 국가 원수 및 각료들이 정기회합을 갖는 데 합의했다.
엘리제조약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원수끼리 손을 잡다니. 구대륙(유럽) 국가들의 독자적인 세력 형성을 꺼렸던 미국과 영국의 충격이 특히 컸다. 단순히 ‘과거를 청산하고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자’는 수준을 훨씬 넘어 정치적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었다. 영국의 유력지 가디언은 ‘전쟁의 싹이 텄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독일과 프랑스는 어떻게 악수를 나눴을까. 우선 앵글로색슨이 좌우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드골의 반감이 컸다. 드골은 두 가지 사안에 불만을 품었다. 식민지인 알제리 독립을 막는 데 미국이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사실상 방해했다고 여겼다. 미국이 프랑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잠수함 발사 폴라리스 핵미사일을 영국에 제공한다는 방침이 알려졌을 때 드골은 이렇게 내뱉었다. ‘영국이 미국의 위성국가가 되기 원한다면 그렇게 해라.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도 가입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를 배제하려는 데 화가 치민 드골이 미국과 영국에 대한 견제수단으로 고른 게 독일 카드였던 셈이다. 드골은 진행 중이던 협상에 박차를 가하며 서독과 우호조약을 서둘렀다. 서독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범 국가의 멍에를 벗어난 데 이어 초대형 조약을 맺으며 국제무대에 복귀할 기회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미국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는 단안을 내렸다.
경제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1860년 영불통상조약(콥든-슈발리에 협정) 이후 영국에 대한 의존도만 심화했다는 피해의식 속에 서독과 손을 잡았다. 1951년 출범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통해 최소한의 상호 신뢰가 쌓여 있던 상황. 프랑스와 서독은 막판 협상을 초고속으로 진행하며 엘리제 협정을 맺었다.
엘리제 협정은 나날이 진화해 40주년을 맞는 2003년 유럽연합(EU) 탄생으로 이어졌다. 양국의 군대를 섞어 1989년 창설된 독불여단은 오늘날 유로군단의 핵심이다. 2006년에는 청소년들의 건의로 공통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졌다. 독일과 프랑스의 정상은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주요 장관들은 3개월에 한 번씩 정례회의를 갖는다.
엘리제 조약은 유럽판 한일관계처럼 꼬일 대로 꼬이고 상할 대로 상했던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동맹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조약이 맺어지는 데는 상호 존중과 양보, 가해자인 독일의 철저한 반성과 사과가 있었다. 두 나라는 다른 나라의 압력도 물리쳤다. 무엇보다 양국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국과 일본도 좋은 이웃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지만 엘리제 조약 체결 전후와 비교하면 모든 게 반대다. 어떻게든 한국과 일본을 묶으려는 제 3국의 압력이 여전하고 앞에서는 웃고 사과했다가 뒤돌아서자마자 딴소리하는 가해자의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국민적 지지는커녕 분노만 높아질 판이다. 가장 뼈 아픈 대목은 가뜩이나 대립이 심한 나라에서 구조적 갈등 요인만 하나 더 생길 판이라는 점이다. 일을 왜 이렇게 하나. 어떻게 감당하려고.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