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252> 이탈의 철학



어느 재단법인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는 지인이 황당하다며 들려준 이야기다. 얼마 전 근무 3년 차인 30대 여사원이 ‘카톡 퇴사’를 선언하곤 잠적해 버렸다는 것이다. 주된 이유는 잦은 야근과 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그만둔 직원은 완벽주의자 스타일인 지인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듯했다. 업무상 문제가 있으면 주말에도 전화를 하고, 받지 않으면 ‘직업윤리’(working ethics)가 제대로 학습되지 않았다며 힐난하는 지인의 습관 탓이 커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게 물어봤다. 왜 그렇게 젊은 후배를 못살게 굴었냐고. 그러자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훈련받았다. 힘들 때는 솔직하게 말하고 소주 한 잔 하면서 털어버리는 법도 배웠다. 어려운 일을 소통하려 하지 않고 카톡 퇴사 후 잠적해 버리는 그 여직원이 이상한 것이다.” 어느 한쪽만의 잘못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철저한 복무 자세를 강조하는 지인과 그것을 묵묵히 참다가 나중에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부하 직원 모두 ‘너무 강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다.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문화 특유의 성급함이 참을성 없는 젊은 여직원을 벼랑 끝으로 몬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분석해본다. 상사의 감정을 살피고 행동의 저변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짜증난다’고 폭발해 버리는 요즘 세대의 습관이 과했을 거라는 추측과 함께. 이유야 어찌됐든 갑작스런 퇴사 통보는 분명 성숙한 태도는 아니었다. ‘이탈자’로서 지켜야 할 기본사항, 그러니까 일종의 ‘이탈 철학’이 결여된 즉각적인 반응에 가깝다.


요즘 유행하는 기업 정보 공유 사이트들을 돌아다녀 보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좋지 못한 모습으로 회사를 그만두는지 좀 더 상세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사이트는 대개 20~30대 초급 사원들을 주 이용자로 삼는다. 젊은이들 시각에서 회사의 문화와 보수체계, 장래성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유자재로 나누는 편이다. 동료 이용자들끼리 익명으로 대화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돈 이외의 원인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군대 문화, 업무 성과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내 정치 분위기, 차별대우 같은 것들이 젊은이들의 이탈을 정당화해주고 있다. 내가 본 기업 정보 공유 사이트에서는 이직자들에게도 나름의 ‘이탈 철학’이 있다는 점을 알려줬다. 우선 다니던 회사에서 꽤 쓸만한 인맥은 끝까지 관리한다. 나중의 평판 조회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일이다. 이직할 결심이 확실해지면 인사팀과 상사의 회유를 극복해 내기 위한 ‘강철심장’을 훈련시킨다. ‘다른 부서로 발령 내 준다’, ‘더 좋은 보수 조건을 약속하겠다’며 감언이설을 쏟아낼 때 ‘No’라고 할 수 있는 결기를 다진다. 이 두 가지가 부족하면 이탈 철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냥 평범하게 ‘돈 많이 주는 직장’을 좇아가는 생활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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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선택을 두고 제 3자가 ‘철학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게 무슨 소용이며, 무슨 상관이냐고 얘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떠나겠다는 사람을 바라보는 내부의 시선 또한 좋을 리 없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면 모든 게 쉬워 보이기 마련이니까. ‘평생 직장이 어디 있냐’고 이야기하면서도 당장 이직하겠다는 동료를 보면 혀를 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다른 데로 떠나 버릴 수가 있느냐, 인내심이 부족하다, 젊은 사람은 그래서 안 된다’는 편향적인 결론으로 치닫고 만다. 그러나 소속을 바꾸고 새로운 선택을 하기까지, 그러니까 이탈을 결심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 리는 없지 않은가. ‘이탈 철학’은 이래저래 직장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쿨하게 회사를 떠나기 위해 구축된 가치이자 방법론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탓하려면 떠나는 사람보다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한 건 아닌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이탈자의 등장은 경고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경고.


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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