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하고 열흘 만에 명함 반 통을 써버렸어요.”
베테랑 야구선수에서 새내기 직장인으로 변신한 임재철(40)은 명함을 내밀며 쑥스럽게 웃었다. ‘스포츠사업본부 국장’이 된 임재철을 최근 그의 직장인 서울 강남의 갤럭시아SM에서 만났다. 중계권 사업과 손연재(리듬체조)·박인비(골프) 등의 매니지먼트를 하는 회사다. SM엔터테인먼트와의 제휴로 IB월드와이드에서 사명을 바꿨다.
야구선수가 은퇴 후 스포츠마케팅업체에 재취업하기는 임재철이 사실상 처음이다. 1999년 프로야구 롯데에 입단한 외야수 임재철은 지난해까지 17년간 삼성-한화-두산-LG-롯데를 거쳤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61, 30홈런, 231타점. 2005년 두산에서 타율 0.310으로 타격 6위에 오르기도 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헌신적인 플레이와 빈틈없는 자기관리로 동료들과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트레이드 마크인 강철어깨로 레이저 송구를 뽐내던 그가 타격까지 잘할 때면 팬들은 ‘타신(打神)’이라고 치켜세웠다.
지난해 말 방출된 임재철은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다른 팀에서 입단 제의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선수생활 연장에만 매달리는 것은 후배들을 생각해서라도 아닌 것 같다”며 미련을 버렸다. 선택지는 3가지였다. 코치직과 TV 해설위원, 스포츠마케팅사 입사. 직장인으로서의 새 출발은 주변 사람 90%가 반대했다. 임재철은 그러나 회사의 거듭된 제안에 개척자가 돼보기로 했다. 갤러시아SM은 메이저리그 해설위원이기도 한 송재우 이사가 직접 임재철의 아내를 만나 설득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달부터 출근한 임재철의 업무는 ‘보물찾기’. 메이저리그나 국내프로야구에서 활약할 재목을 골라 회사에 추천하는 것이다. 국내프로야구에도 에이전트 제도가 공식 도입될 경우 임재철의 역할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그는 “오전9시까지 출근해 낮12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6시에 퇴근하는 생활이 처음엔 어색했다. 멍할 때가 많았다”며 “지금은 내가 할 일이 뭔지를 아니까 적응도 빨리할 수 있다”고 했다. 선수 시절 웨이트트레이닝에 철저하기로 손가락에 꼽혔던 임재철은 지금은 7층 사무실까지 걸어 올라가는 게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다. 사회인야구팀에서 투수로 와달라는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는데 “못 하면 망신이라 골치 아픈 상황”이라며 웃었다.
임재철은 15일 일본 오키나와로 2박3일 출장을 간다. 입사 후 첫 해외출장. 각 구단 전지훈련 캠프를 돌며 선수들을 살피는 작업을 하게 된다. 돌아와서는 지방을 돌며 고교 대회를 관전해야 한다. 임재철은 “선수 때는 구단 버스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며 “선수 때보다 훨씬 빨리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임재철에게 그가 경험한 최고 성실파 선수와 천재형 선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성실성은 손시헌(NC)·박용택(LG)·박종윤(롯데)·이범호(KIA)·이승엽(삼성)이 최고, 천재성은 유희관(두산)·박기혁(KT)·임창용(전 삼성)·이병규(LG·9번)가 돋보였다”고 답했다. 지금은 성실함에 천재성까지 보이는 유망주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고령 선수가 되겠다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오래오래 뛸 수 있게 도와야죠. 형편이 어려워서 원하는 글러브를 못 사는 선수들도 있어요. 그런 친구들이 다른 걱정 없이 야구에 전념하게 할 겁니다.” 임재철은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새로운 길을 낸 셈이잖아요. 제가 잘 닦아놓아야 앞으로 은퇴할 후배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질 거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