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아줌마는 용감했다...마지막 침공



1797년 2월 22일 오후 4시, 영국 남서부 웨일스의 작은 어촌 피시가드(Fishguard). 쾌속선 보뚜흐(Vautour)호가 부둣가로 들어왔다. 목적은 간 보기. 영국 국기를 걸었으나 실은 프랑스 함대가 보낸 정찰선이었다. 정찰선은 해안포의 경고 사격 한 발을 받고 바로 돌아갔다. 뒤에 포진하던 프랑스 분견함대는 방어가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보고를 받고 결정을 내렸다. ‘상륙!’

대형함은 아니지만 1,180톤급 최신형 프리깃 2척을 포함해 4척으로 구성된 프랑스 분견함대는 이튿날 오전 2시부터 야음을 틈타 피시가드 서쪽 4.8㎞ 지점에 병력을 내려놓았다. 17척의 상륙보트는 병력 1,400명과 화약 47통, 탄약과 척탄 50톤, 병력 2,000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화기와 부수 장비를 실어날랐다. 보트 한 척이 파도에 휩쓸려 포병 장비와 장약을 분실했어도 프랑스군은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프랑스로서는 삼수 끝의 개가였다. 나폴레옹의 동료이며 경쟁자로서 ‘전쟁의 달인’ 소리를 들었던 말단 병사 출신의 사령관 라자르 오슈(Lazare Hoche) 장군이 이끄는 1만 5,000명의 장병과 44척의 함대가 북해의 풍랑으로 연이어 실패한 뒤 맛본 본토 상륙. 아일랜드 독립파와 연합해 영국 본토로 진군하겠다던 애초 계획에 비해 규모가 미미했어도 손쉽게 뭍에 닿았다.

마침 피시가드는 무주공산이었다. 예비역 의용대 300여명과 수병 150명, 의용기마대 250명이 부근에 주둔했으나 훈련 때문에 하루 이상의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저항받지 않고 행정 상륙한 프랑스군은 방어진지 구축도 마치고 마을로 들어왔다. 여기까지 순풍에 돛단 듯 풀리던 프랑스군의 진로는 갑자기 막혔다. ‘술이 웬수’였다.

프랑스군은 마을의 주점과 해안가에 난파한 포르투갈 선박에서 위스키며 와인을 빼앗고 찾아내 들어부었다. 술이 들어간 군대는 적진에서도 이성을 잃었다. 하긴 처음부터 병력 구성에 문제가 있었다. 상륙군 1,400명 중에 정규군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600여명 뿐이고 나머지는 탈영병과 잡범, 왕당파 정치범이 섞인 오합지졸이었으니까.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프랑스군이 약탈에 나서자 분노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남자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여자들은 낫과 갈고리, 쇠스랑, 심지어 빗자루까지 꺼내 들고 프랑스군 진영을 향했다. 술에 취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프랑스군 진영에 곧 공포가 덮쳤다. 웨일스 전통 의상인 높고 검은 모자에 붉은 외투를 입은 여인들을 영국군 최강인 왕립 근위보병연대라고 착각한 것이다. 술에 취하고 공포에 질린 군대가 웨일즈 전통의상을 입은 아줌마 부대와 조우할 무렵, 급보를 받고 급속 행군해온 영국군이 곳곳에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월가의 투자분석가이며 경제사가인 피터 번스타인이 명저 ‘황금의 지배’에 남긴 당시의 상황.

‘프랑스군은 곧 이들이 전통적인 축제 복장을 차려입은 웨일즈 여인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지만 이 축제 복장은 이 여인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프랑스 병사들을 두들겨 패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 여인들 중의 한 명인 제미마 니콜라스(Jemima Nicholas)는 쇠스랑을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휘둘러서 프랑스 병사 14명을 사로잡았다고 인정받기도 했다.’ *

싸움은 간단하게 끝났다. 33명이 죽거나 다친 프랑스군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지휘관 윌리엄 테이트(William Tate)는 24일 오후 2시 영국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깥 해역에서 대기하다 도주하던 프랑스 함대도 영국 해군에 걸려 비슷한 최후를 맞았다. 프리킷 두 척은 영국 해군과 교전 끝에 나포당하고 말았다. 진수 후 처녀 항해였던 프랑스 해군 ‘레지스탕스’호는 영국 해군에 나포당해 함명이 ‘피시가드’호로 바뀌었다.

불과 이틀 만에 종결된 피시가드의 작은 전투는 두 가지 의미와 흔적을 남겼다. 첫째, 영국사는 이 사건을 본토에 대한 ‘마지막 침공(the last invasion)’으로 기록한다. 프랑스군이 이후에도 몇 차례 아일랜드에 상륙했으나 영국인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18세기 말에 ‘작은 침공 시도’ 이후에는 누구도 영국 땅에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냈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두 번째 영향은 보다 지대하다. 피시가드 사건은 영국 경제사와 중앙은행의 역할, 화폐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경제적 영향을 파악하려면 우선 프랑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왜 그랬을까. 도무지 정공법으로는 보기 어렵다. 외국인을 지휘관으로 삼은 데다 침공군을 어중이떠중이로 구성했다는 점에서다. 못 먹을 감 찔러나 보는 심정에서의 의도적 교란 목적이었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대규모 정규군을 아일랜드로 파병해 병력을 불린 다음 영국을 침공하겠다는 의도가 두 번이나 좌절된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소규모 병력으로 영국을 괴롭히면 다행이고 안 되어도 잃을 게 없었다. 프랑스의 계산 착오가 있었다면 현지의 반응을 제대로 못 봤다는 점 정도다. 프랑스는 현지에서 도와줄 세력이 있을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잉글랜드에 대한 웨일스의 반감을 염두에 뒀다는 얘기다.


상륙군의 무기 목록에 보병 2,000명분의 무장 일체가 포함된 것도 같은 이유로 풀이된다. 로마화한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 노르만족의 피가 잡다하게 섞인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을 웨일스의 순혈 켈트족을 무장시키겠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피시가드 상륙부대가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상륙지점도 같은 웨일스 지방인 브리스톨 항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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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영국의 혼란을 부추기려는 사석(捨石) 작전으로 피시가드 전투를 치렀다면 프랑스의 의도는 대성공을 거뒀다. 무엇보다 영국은 비상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대규모 아일랜드 원정군의 위협에 떨었던 게 바로 한 달 전. 프랑스 혁명군이 도버 해협을 언제 넘을지 불안에 떨던 터에 프랑스 원정함대가 출항했다는 첩보에 따라 해군 함선을 긁어모아 바다로 내보냈던 마당이다.

피시가드 침공 소식이 런던에 전해진 25일 토요일 오전, 도시 전체가 불안감에 젖었다. 잉글랜드 은행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당시 런던에서 주로 통용되던 돈은 지폐인 잉글랜드 은행권. 사람들은 종이 금(지폐)을 진짜 금(금화)으로 바꿔 달라고 아우성쳤다. 같은 날 오후 잉글랜드 은행은 태환(금 지급)이 더이상 어렵다는 급보를 피트 수상에게 올렸다. 일요일인 26일 국왕 조지 3세와 피트 수상, 대법원장과 잉글랜드 은행 총재가 머리를 맞대고 긴급 칙령을 발동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의회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금 태환을 정지한다’는 칙령과 함께 신문들은 애국심을 자극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스페인의 아르마다(무적함대)와 싸울 때도 우리 조국은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영국인답게 호들갑 떨지 말자’는 기사가 쏟아졌다. 약발이 먹혔을까. 반대다. 잉글랜드 은행이 지불준비금으로 비축한 금이 200만 파운드 정도인데 하루에 10만 파운드씩 인출 요구가 밀려 들어왔다.

영국 의회는 한 걸음 더 나가 3월 9일 긴급 칙령을 아예 법(제한법·Restriction Act)으로 굳혔다. 잉글랜드 은행권(지폐)을 창구에서 제시하는 고객에게 금을 내주지 않아도 된다는 제한법은 신용경제의 근간이던 금본위제도를 뒤흔들었다. 진짜 돈(금)과 바꿀 수 없는 불태환 지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볼 것도 없다. 뻔한 결과를 불렀다. 가치 하락.

사람들은 돈의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현물을 확보하려 애썼다.(경제학은 이를 합리적 선택이라고 한다) 사재기 경쟁이 발생한 것이다. 당연히 물가가 더 올랐다. 영국 경제는 가치가 불안정해진 돈이 물가를 자극하고, 물가가 오르니 돈의 가치는 더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져 들어갔다. 더욱이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던 전시경제체제인데다 대륙 봉쇄령으로 고통이 가중됐다. 잉글랜드은행의 태환성 회복은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보다 한참 뒤인 1821년에서야 가까스로 이뤄졌다. 물가도 이때서야 피시가드 침공 수준을 되찾았다.

나라 빚은 늘어나고 완전한 금본위제도로의 복귀 가능성도 점칠 수 없었던 시절, 혼란 속에서 금융정책을 둘러싼 논쟁도 가열됐다. 데이비드 리카도가 등장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그저 돈 잘 버는 주식중개인으로 알려졌던 리카도는 ‘모닝 크로니클’지에 금융정책을 비판하는 세 편의 기고문으로 일약 토마스 맬서스와 맞먹는 경제이론가로 떠올랐다. 리카도가 포함된 의회의 특별조사위원회는 무수한 청문회를 거쳐 금본위제도로 복귀하면서 잉글랜드 은행의 명실상부한 중앙은행화라는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의회의 조사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자 영국은 1844년 잉글랜드은행에 한해서만 전국에 걸친 지점 설립을 허용했다. 더욱이 런던으로부터 반경 65마일(104.6㎞) 안에서의 은행권(지폐) 발행은 잉글랜드 은행에 독점권을 줬다. 잉글랜드 은행은 그저 정부 업무를 ‘많이 위임받는 중요한 은행’에서 독점적 발권은행으로서 사실상의 중앙은행으로 자리를 굳혔다.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은 1668년 설립된 스웨덴의 락스방크지만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으로는 잉글랜드 은행이 효시로 꼽힌다.

영국의 상업적 성공을 바라보던 다른 나라들도 앞다퉈 중앙은행을 세웠다. ‘불 그리고 바퀴와 더불어 유사 이래 인류의 3대 발명품의 하나’라는 중앙은행 시스템은 각국으로 급속하게 퍼지고 지구촌은 점점 더 서로를 닮아갔다. 용감한 아줌마들이 술 취한 군인들을 때려잡은 피시가드 사건은 세계 경제사의 보이지 않는 전환점이었던 셈이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마지막 침공 당시 청어잡이로 북적였던 피시가드는 오늘날 인구 3,400명 남짓한 작은 어촌. 19세기 초중반 고래잡이를 다룬 그레고리 펙 주연 영화 ‘백경(Moby Dick·1955년작)’의 주 촬영장소였을 정도로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에는 마지막 침공과 관련한 두 가지 유적이 남아 있다. 하나는 영국군의 야전 지휘본부 겸 감옥으로 사용됐던 주점 ‘로열 오크 펍(Royal Oak Pub)’. 영국군 지휘관인 코더경이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낸 이 주점은 작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두 번째 유적은 침공군 한 다스(12명·피터 번스타인은 저서에서 제미마의 포로를 14명으로 기술했으나 12명설이 더 유력하다)를 잡은 제미마 니콜라스의 비석. 피시가드 사건 100주년인 1897년 시민들이 돈을 거둬 세운 제미마의 비석에는 ‘웨일스의 영웅’이라는 표제 아래 당시 나이가 47세였으며 1832년 82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다른 사료에 따르면 제미마는 대장장이의 부인이었다. 쇠스랑을 잘 휘두른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결혼한 적이 없는 미혼모로서 딸과 아들을 뒀다는 자료도 있다) 웨일스의 여걸(女傑), 제미마는 죽을 때까지 국가로부터 연 50파운드의 연금을 받았다. 당시 런던의 일반 사무직 연봉이 75파운드 정도였다.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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