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K기업은행은 ‘문화콘텐츠금융부’라는 독특한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IBK기업은행이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특수 목적 은행인 것처럼, 이 부서 역시 문화·콘텐츠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특수 목적 부서이다. IBK기업은행이 이 조직 운영을 통해 문화·콘텐츠 기업 지원은 물론 수익 창출도 함께 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아무리 그래도 우리 은행을 터는 건 좀…” 2013년 초, 서울 중구 을지 로에 위치한 IBK기업은행 본점에서는 ‘이상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IBK기업은행 마포 지점을 꼭 털고 싶다’는 한 통의 협조 요청 공문이 이 회의가 소집된 배경이었다. “도와줍시다. 작품을 만드는 데 꼭 필요 하다고 하잖습니까. 그리고 이미 다른 곳에선 거절당해 도와줄 곳이 우 리밖에 없다고 합니다. 도와줍시다.”
지난 2013년 7월 개봉한 영화 ‘감시자들’을 보면 노련한 범죄조직이 은행 보안 시스템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인 제임스(정우성 분)가 얼마나 주도면밀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영화 전개에 꼭 필요한 신(Scene)이었다. 이 영화의 제작사인 ‘영화사 집’ 관계 자들은 이 장면을 위해 며칠을 동분서주했다. 장소 섭외가 쉽지 않아서 였다. 수년간 관계를 맺어온 주거래 은행조차도 대답은 ‘No’였다. 보안 과 신뢰가 생명인 은행업 특성상 이미지 실추 우려가 크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곳은 IBK기업은행이었다. 영화사 집과 IBK기업은행이 아주 생소한 사이는 아니었다. 영화사 집은 IBK 기업은행과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 협약으로 진행 중인 ‘문화·콘텐츠 강소기업 육성 지원사업’ 프로그램에 선정된 인연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 제작을 위해 금고를 열어달라고 부탁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고 꺼낸 말에 뜻밖에도 IBK기업 은행 문화콘텐츠금융팀은 “가능한 방향으로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IBK기업은행으로부터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감시자들’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는 은행털이 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금융사 최초의 문화·콘텐츠 전문 조직
같은 해 7월 IBK기업은행의 문화콘텐츠금융팀이 문화콘텐츠금융부로 승격됐다. 2012년 1월 금융권 최초로 문화·콘텐츠 기업 지원 조직(팀)을 만든 데 이어 또다시 금융권 최초의 시도였다. 현재까지도 문화·콘텐츠 기업 지원 조직을 부 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곳은 IBK기업은행이 유일하다. 문화콘텐츠금융부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을 상대로 직접 금융 지원을 한다는 점에서 간접 지원 위주의 다른 금융사 문화·콘텐츠지원 부서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다른 금융사에서는 별도의 조직을 갖추고 있는 곳도 드문 실정이다.
IBK기업은행이 문화·콘텐츠 산업 지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2010년에는 문화·콘텐츠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내부 논의에 불이 붙으면서 여러 계획안이 나왔다. 하지만 문화·콘텐츠 산업 현장을 모르는 까닭에 실효성 문제가 제기됐다. 가장 기본이 될 금융 지원만 하더라도 문화·콘텐츠 기업들의 특수성 탓에 일반적인 기업 평가 기준을 들이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IBK기업은행이 찾은 해법은 문화·콘텐츠 산업에 밝은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오는 것이었다. IBK기업은행은 이듬해인 2011년 1월부터 외부에서 문화·콘텐츠 분야 전문 인력들을 수혈해 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2012년 1월 마침내 국내 금융사 최초의 문화·콘텐츠 기업 지원 조직인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팀이 신설됐다.
2011년 1월 문화·콘텐츠 분야 전문 인력으로 처음 영입된 윤성욱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 투자총괄 과장은 말한다. “저는 영화 ‘올드보이’를 만들고 배급했던 쇼이스트라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IBK기업은행에 오기 전까지도 영화 배급과 콘텐츠 투자에 관련한 일을 하고 있었고요. IBK기업은행에서 문화·콘텐츠 기업 지원과 투자 업무에 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오게 됐습니다. 저의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역량 있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을 돕는 일이라 뿌듯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제1금융권 지원이 부진했던 이유
문화·콘텐츠 분야는 우리나라가 핵심산업으로 키워야 할 제1순위 산업으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한 대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고급 인력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 분야가 사회·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력이나 부가가치 창출 능력이 매우 큰 것도 이유다. 문화·콘텐츠 산업은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자원 소비나 환경오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문화·콘텐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민간 투자 활성화와 함께 제1금융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조달 비용금리 수준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수익금 배분 조건 역시 다른 투자자들에 비해 문화·콘텐츠 기업에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짤 수 있다. 하지만 문화·콘텐츠 기업들은 기존의 정량적인 기업평가로는 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가 어렵고, 특히 중소기업들은 고위험 산업군으로 분류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정상적인 경로로는 제1금융권의 지원을 받기어려워 문제가 된다.
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문화·콘텐츠 분야는 리스크가 너무 커 제1금융권에서 직접 투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화·콘텐츠 기업들은 부채를 깔고 시작하는 곳이 많고 한 작품의 흥행 여부에 따라 기업의 존속이 불투명해지는 곳도 있거든요. 또 콘텐츠 준비 기간은 수익이 발생하기 어려운 구조라 재무나 재정 능력으로만 평가해서는 낙제점을 받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윤성욱 과장은 말한다. “그동안 국내 문화·콘텐츠 기업들은 벤처캐피털등의 모험자본 위주로 자금을 마련해 왔습니다. 제1금융권의 지원은 거의 받질 못했죠. 제1금융권의 대출·투자 프로세스는 주로 제조업 기업 중심의 평가 시스템을 따르는 데다 재무평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문화·콘텐츠 기업들의 사업 내용은 다른 업종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금융권의 기존 기업 평가 방식으로는 이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수상한 그녀’ 220% 수익률 기록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BK기업은행은 문화·콘텐츠 기업들을 위한 평가 방법을 따로 마련하고 있다. 이 평가 방법은 금융권의 일반적인 기업 평가 시스템보다 상대적으로 비정형화돼 있다는 특징이 있다. 문화·콘텐츠 업종의 특성을 고려해 입체적인 평가를 한다는 말이다. 윤성욱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 투자총괄 과장은 말한다.
“비즈니스 모델, 사업구조는 당연히 봅니다. 개별 콘텐츠의 흥행성도 중요하게 검토하고요. 작품 기획이나 제작 과정에서 금융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 대출이나 투자를 위한 적정성 확인 차원입니다. 제일 중요한 평가 요소는 비즈니스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력과 실력, 평판입니다. 소프트웨어 중심의 기업들은 결국 사람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세부 평가 항목들이 마련돼 있긴 하지만, 이들의 배점 구성비를 정해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건 아니다. 개별 콘텐츠의 흥행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해도 작품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투자한다. IBK기업은행이 국책은행으로서 짊어져야 할 정책금융적인 목표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윤성욱 과장은 말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참신한 소재에 뛰어난 작품성을 가지고 있는 영화죠. 다만 흥행 요소가 조금 부족해 수익은 안 났습니다. 투자 손실이 났죠. 하지만 이 영화는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런 성과도 저희에게는 소중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투자 지원에서도 종종 의외의 성과가 나온다.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 투자 부문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수상한 그녀’가 좋은 예이다. 독특한 소재에 작품성까지 갖춘 이 영화는 흥행 요소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관객을 끌어모을 만한 톱스타급 배우는 영화 말미에 잠깐 얼굴을 내비치는 김수현 정도가 다였고, 장르도 관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코미디 드라마였다. 제작비 역시 35억 원으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수상한 그녀’는 관객 수 865만 명을 기록하며 대박을 쳤고, IBK기업은행은 무려 220%라는 어마어마한 수익률을 기록해 화제가 됐다.
투자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문화·콘텐츠 투자자들은 작품의 흥행을 예상해 대출이나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데,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죠. 작품을 직접 만드는 제작자 입장에서도 대박일지 쪽박일지 모르고 작업하는데, 이걸 밖에 있는 사람들이 예측하기가 쉽나요. 잘 만들어 놓고도 배급이 꼬이거나 비슷한 시기에 대형 블록버스터급의 경쟁작이 나와 흥행에 실패하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작업 중인 프로젝트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되는 일도 가끔 있죠. IBK기업은행이 문화·콘텐츠 투자 부문에서 국책은행의 역할을 병행하면서 수익도 함께 내고 있는 건 대단한 겁니다.”
단순 퍼주기식 지원은 지양
IBK기업은행의 연간 문화·콘텐츠 분야 투자 수익률 목표치는 5~10%다. 2013년 문화콘텐츠금융부가 조직된 이후 IBK기업은행은 꾸준히 목표치에 부합하는 수익률을 기록해 왔다. 투자한 몇몇 영화가 100%이상의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의외로 그리 높지 않은 수익률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IBK기업은행이 중소기업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국책은행인 까닭에 수익률만 좇는 식의 운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IBK기업은행이 지원하는 콘텐츠 기업들은 영화 부문 외에 방송, 공연, 전시 등 총 7개 분야나 된다. 이 중 영화 부문이 상대적으로 제작 비용이 큰 데다, 흥행에 성공할 경우 투자 레버리지 효과가 높아 다른 콘텐츠 부문 투자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는 사례들이 많다.
IBK기업은행의 여러 문화·콘텐츠 투자 실적 중 유독 영화 부문이 주목을 많이 받는 이유다. 하지만 영화 외의 부문에서도 흥행 실적이 상당하다. MBC에서 주말 드라마로 방영된 ‘왔다! 장보리’는 최고 시청률이 37.3%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윤 과장은 말한다. “저희는 단순 퍼주기식 지원을 지양합니다. 정말 좋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고 제작 능력까지 좋은데,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하다든가 제작비가 부족해 실력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곳을 찾아 지원하는 데 주력하죠. 지금까지 저희가 한 활동들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잘할 수 있는 기업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기업들을 선별해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실력 있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원 활동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작품당 수익률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
IBK기업은행을 비롯한 문화·콘텐츠 제작사 및 투자사들은 개별 작품의 수익률을 대부분 비공개로 한다. 같은 작품에 투자한 다른 투자자들의 수익률이 의도치 않게 같이 공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가판권(附加版權) 등 옵션 조항에 따라 투자 수익률이 조금씩 변동될 수도 있어 혼란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다.
올 여름 개봉 ‘인천상륙작전’에도 투자
IBK기업은행은 2016년에도 다양한 문화·콘텐츠 기업들을 지원할 예정이다. 1월 현재 영화 부문 1개 작품에 투자가 확정돼 제작을 지원중이다. 올해 여름 개봉 예정인 이 영화의 제목은 ‘인천상륙작전’이다. 이정재, 이범수, 리암 니슨, 추성훈 등이 출연할 예정으로 6.25전쟁의 전세를 바꿨던 인천상륙작전을 그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