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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의 심장인 한국거래소가 3일 환갑을 맞았다. 거래소의 출범과 함께 문을 연 국내 주식시장은 한국경제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지난 60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지난 1956년 개장 당시 상장기업 수 12개로 출발한 한국 증시는 60년 만에 160배가 넘는 1,929개 기업을 거느린 자본시장의 젖줄로 자리매김했다. 증시의 현주소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인 시가총액은 관련 통계가 처음 집계된 1965년 150억원에서 올해 현재 1,400조원대(코스닥 포함)로 무려 9만배 이상 불어나며 세계 13위(시총 기준) 규모로 급성장했다. 한국거래소는 여기에 만족지 않고 국내 증시를 중장기적으로 세계 7위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한국거래소는 1956년 3월 3일 '대한증권거래소'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뗐다. 출범 당시만 해도 상장기업 수는 조흥은행·저축은행·한국상업은행·흥업은행 등 은행 4개와 대한해운공사·대한조선공사·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운수·경성방직 등 일반기업 6개, 정책적 목적으로 상장된 대한증권거래소와 한국연합증권금융 등 총 12개에 불과했다. 이들 가운데 경성방직(경방)과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대한해운공사(유수홀딩스) 등 단 3곳만이 간판을 바꿔 달은 채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3년 처음으로 100개를 넘어선 상장기업 수는 올 3월 현재 유가증권시장(770개)과 코스닥(1,159개)을 합해 총 1,929개에 달하고 있다.
한국 증시가 지난 60년간 '상전벽해'하는 동안 수많은 희로애락의 순간을 동시에 경험했다. 1962년 증권거래법 제정과 함께 점차 제대로 된 주식시장의 모습을 갖춰가던 한국 증시는 그해 5월 투기세력들로 거래소가 지급불능에 빠지며 장기 휴장에 들어가는 '증권 파동'을 겪었다. 1968년 제정된 자본시장육성 특별법과 1972년 기업공개촉진법 등을 통해 주식시장도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한국 증시의 투톱인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증시에 입성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국거래소는 1979년 명동에서 지금의 여의도로 터전을 옮겼다.
한국 증시는 이른바 '3저 효과'를 등에 업고 한국경제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눈부시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증시 대중화 시기가 이때다. 포항제철(포스코)과 한국전력 등 국민주 보급 정책에 힘입어 종합주가지수는 1989년 3월31일 사상 첫 1,000을 돌파하며 주가지수 '네자릿수 시대'가 열렸다.
1990년대는 증시 해외개방화의 영욕이 엇갈린 시기다. 1992년 1월 외국인의 국내주식 직접투자를 처음 허용한 데 이어 1998년 5월에는 외국인의 주식투자 한도를 완전 철폐했다. 1992년 4.9%에 불과하던 외국인의 국내주식 보유비중도 올해 현재 31.7%로 6배 넘게 늘어나면서 외국인이 한국 증시의 큰손으로 거듭나게 됐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직후 부도 위기에 내몰린 기업들이 줄줄이 상장 폐지됐고 이듬해인 1998년 6월에는 코스피지수가 277.37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금융시장 개방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재기에 나선 국내 증시는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과 정보기술(IT) 벤처 붐에 힘입어 2007년 7월 처음으로 코스피지수가 2,000선을 넘어섰다. 하지만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2011년 이후 코스피는 장기 박스권에 갇힌 채 '박스피(박스권+코스피)'라는 오명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