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찰청 앞을 지나다 어느 행인이 피켓을 들고 ‘XXX 기업 회장 물러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을 봤다. 썩 생경한 풍경은 아니었다. 광화문, 서대문, 시청 곳곳에서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시위를 볼 수 있다. 그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배경은 개인적이지만 절대 개인적이라고 할 수 없는 아픔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들의 피울음 섞인 외침이 얼마나 많은 공감을 얻고 있을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무관심하다. 지금은 참여 민주주의의 시대라고 하고, SNS에서는 국민 감정을 환기할 만한 특정 주제가 언급되면 금세 단죄의 분위기가 확산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선은 정말 냉담하다. 그들에게 물 한잔 주기는커녕 무서워하며 도망가듯 지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건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
시위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정치는 누군가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조직화 방식이다. 나만의 외침은 정치라기보다는 불만 표현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주장한 ‘진지전’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회를 바꾸거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된 구호와 이념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철학적 연대가 반드시 정치적 연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감정과 이성을 한데 뒤섞어 함께 거리와 전선으로 나서게끔 하는 토대가 필요하다. 그람시는 그것을 ‘진지’라고 불렀다. 전쟁터에서 총알을 날리는 적군을 기다리며 온 몸을 던질 준비를 하는 진지. 그 토대를 구축하지 못하는 전투는 필패다.
안타깝게도 내가 경찰청 앞에서 봤던 그 ‘항거자’는 진지를 구축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던 듯 하다.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건 직간접적인 이해관계에 있기 때문이건 집회 참가자들은 열성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길 원하는 집회 주최측과 정해진 규칙 및 규정을 지키도록 통제해야 하는 경찰 간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 특정 사안에 대해 찬성/반대로 나뉘어 집회를 하는 경우에는 ‘감정싸움’이 심하다. 양극단을 달리는 사안인 만큼 자극적인 문구나 퍼포먼스를 통해 상대방을 자극하는 동시에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는 점을 인정받고 싶은 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갈등의 골이 깊이 패인 집회들은 수많은 이슈를 양산한다. 누군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관계자의 범위가 넓고 중요한 뉴스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결국 일반 대중들이 소비하게 되는 뉴스는 자극적인 퍼포먼스 위주일 때가 많다.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하지만 목소리에 집중하기 힘든 상황을 초래하는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왜들 저래’라며 아예 외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유 중 하나다.
감정이 깊이 개입된 주장은 호소력이 짙다. 그러나 반대로 ‘오바한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도 크다. “우리 회사에 xx라는 부장이 있는데 세상에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정말 짜증나!” 수화기 너머로 분노한 친구의 이 같은 육성을 들어본 적이 한두 번 쯤은 있을 것이다. 떠올려보자. 나는 친구의 ‘빡침’에 얼마나 공감했었나.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장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100% 공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특히 이미 화가 날대로 난 친구의 상황설명은 본인의 감정을 묘사한 비중이 훨씬 크기 마련이다.
‘감정 과잉’은 제 3자가 공감할 여지를 빼앗는다. 사람들이 온 몸을 날릴 태세를 갖추는 진지를 갖추지도 못한다. 공감을 얻기 힘든 방식으로 대중에게 호소하는 목소리는 듣는 이 하나 없는 ‘메아리’에 그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인데도 묻힌다는 게 억울하지 않은가. 공감을 이끌어 내고 참여로 이어지게끔 하는 전략적 고민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