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광기의 군중십자군



‘이슬람과 싸워 예루살렘을 되찾으라.’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서유럽이 열기에 빠졌다. 교황이 호소한 시기는 1095년 11월. 유럽 각국은 십자군을 출정시킬 시기로 이듬해 8월을 잡았으나 먼저 출정한 부대가 있었다. 말이 십자군이지 한 사제의 선동에 빠진 농부가 대부분. ‘성지를 회복하라는 베드로의 계시를 받았다’는 ‘은자(隱者) 피에르(Pierre l‘Ermite)’의 열정이 넘치는 설교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무리를 지었다. 하급기사와 농부, 여자,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수만명이 넘는 사람들은 훗날 이런 이름을 얻었다. 군중 십자군(People‘s Crusade).*

군중을 모은 것은 허름한 옷에 나귀를 타고 다니던 은자 피에르의 설교도 있었지만 다른 요인도 컸다. 무엇보다 뉴 밀레니엄을 맞아 성서에 나오는 기독교 천년왕국이 시작되리라는 믿음이 퍼졌다. 1095년에는 유난히 별똥별과 월식, 오로라, 혜성 같은 천문현상도 잦아 변동을 예고하는 하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가뭄과 기근, 중노동에 시달리느니 죽더라도 성전(聖戰)에 참전하는 게 낫다는 판단도 사람들을 십자가 깃발 아래에 불러들였다.


문제는 종교적 열망과 현실 탈출에의 의지만 강력했을 뿐, 조직이 없고 식량도 부족했다는 점.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프랑스에서 출발해 갈수록 숫자를 불리며 무조건 동쪽으로 행진하던 군중은 4만여명선으로 늘어났다. 열정이 넘치는데 조직과 식량도 없는 무리는 전투 이전에 다른 싸움부터 만났다. 민생고.

군중십자군은 1096년 4월 12일 퀼른 지방에서 폭도로 돌변해 약탈에 들어갔다. 대상은 유대인 수십명.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유대인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무기와 식량을 사는 데 군중십자군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오히려 ‘예수를 팔아먹은 이교도를 응징한다’고 믿었다. 한번 맛 들린 약탈과 학살은 종교의 이름 아래 습성으로 굳었다. 군중 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을 죽였다. 군중십자군에게 목숨을 잃은 중부유럽의 유대인은 최소 2,000명에서 최대 1만 2,000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독일지역과 북부 프랑스의 유대인 인구의 25~33%에 해당하는 숫자로 유대인 박해가 이때부터 더욱 가혹해졌다. **

유대인 뿐 아니다. ‘성지 탈환’의 대의명분에 협조하지 않는 지역과 주민은 적으로 여기고 전투를 벌였다. 음식을 요구하는 군중십자군을 먹일 여력이 없었던 헝가리에서는 같은 기독교도 4,000여명이 학살 당했다. 어린 아이까지 말뚝에 박아 죽이는 만행에 분노한 헝가리 기병대에 의해 군중십자군은 병력의 3분의 1을 도륙당했다. 불가리아인들도 이들 집단에 화살을 퍼부었다. 살육과 싸움이 잇따른 끝에 무장을 하지 못한 군중십자군의 3분의 1만이 은자 피에르와 함께 트라케 산맥으로 몸을 숨겼다. 나머지는 발칸 반도에 뼈를 묻었다.

궁지에 몰린 군중십자군은 비잔틴(동로마)제국이 살려줬다. 쫓기고 쫓긴 군중십자군에게 자비를 베풀어 콘스탄티노플 외곽으로 안전하게 인도하고, 국왕들이 이끄는 십자군 기사단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설득했지만 막무가내. ‘순례자’를 자처하는 군중십자군 일부가 콘스탄티노플 시내의 집으로 스며들어 물건을 훔치기 시작하자,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선박을 동원해 이들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쪽 해안으로 내려놓았다.


오늘날 터키 땅, 소아시아에 상륙한 군중십자군은 저항하는 셀주크 투르크군이 안보이자 신명이 나서 내달렸다. 투르크의 유인과 매복 작전에 걸려든 군중십자군은 니케아 평원에서 화살 세례에 압도되고 말았다. 백골이 피라미드처럼 쌓였다. 군중십자군은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났다. 몇 안되는 기사로 은자 피에르의 군사 참모 격이었던 이탈리아인 기사 레이날드는 사로 잡혀 개종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으나 종국에는 노예로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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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피에르의 최후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자신만 간신히 살아남아 1차 십자군과 합류했다는 설도 있다.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전투에서 성물(聖物) 롱기누스의 창(Lance of Longinus·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예수를 확인 사살하기 위해 찔렀다는 창)을 찾아냈다고 주장하다 시죄법(試罪法)재판(시련 재판·불 위를 걷게 한 뒤 살면 무죄, 죽으면 유죄로 판결하는 전근대적 재판)의 후유증으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은혜와 축복 대신 증오와 복수를 심은 은자 피에르가 지휘했던 광기는 사라졌을까. 군중십자군 이후 100여년이 지난 뒤 결성된 제 4차 십자군(1202~1204)은 이교도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다 아예 점령해버렸다. 롱로마제국의 그리스인들은 1204년 나라를 빼앗겨 1261년 되찾기까지 라틴제국의 신민으로 살았다. 1212년 10~12세 소년들이 지중해에 도착하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허망에 빠진 채 모여들었다. 결국 7,000~1만 5,000여명의 소년십자군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은자 피에르의 광기로 시작된 십자군은 1290년께 추진동력을 상실했으나 그 변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조지 부시 2세 미국 대통령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학정을 해방시키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고 신은 자신의 편’이라고 강변했다. 비슷한 시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5년 선종)는 하나님의 뜻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있다며 반전운동에 힘을 보탰다. 묻고 싶다. 종교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신에게 반문하고 싶은 게 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민중십자군’, ‘농민십자군’으로도 불리는 군중 십자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30만이 넘었다는 추정도 있지만 4만명이 정설로 내려온다. 주목할 대목은 에미엥의 은자 피에르. 이탈리아의 경제사학자 카를로 치폴라에 따르면 피에르는 남다른 고급 취미를 갖고 있었다. 후추를 뿌린 생선 요리를 광적으로 좋아했다는 것. 당시 후추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金)값에 버금갈 정도로 비쌌다. 누추한 사제가 후추라니! 이미 사망(2000)한 치폴라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피에르의 후추 선호설은 대중의 성지 회복 열망의 밑바닥에는 값비싼 동양의 향신료로 일확천금을 누리겠다는 기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 십자군전쟁이 남긴 가장 큰 오점은 증오를 증폭시켰다는 점이다. 군중십자군 뿐 아니라 정식 십자군(모두 8차례)들도 유대인은 물론 이슬람 교도를 학살해 종족간 종교간 증오심이 깊어졌다. 이슬람의 명장 살라딘이 베푼 용서와 관용을 받고도 십자군은 이교도 학살로 일관해 세상은 종교간 불신과 반목으로 빠져들었다. 초기 이슬람의 전통이던 관용의 정신도 점차 엷어졌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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