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판 슈퍼 301조’ BHC법안 적용 가능성 커
표적국가 환시장 개입 손발 묶이고 환투기 우려
對美 무역흑자 크지만 中·日 보복하기엔 부담
정치·경제적 파장 작은 한국·대만 선택할수도
미국 재무부의 반기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미국이 일본의 엔화 약세에 이례적으로 날을 세우면서 관련 국가들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이 환율 분야의 ‘슈퍼 301조’로 불리는 교역촉진법(베넷해치카퍼법·BHC법) 발효를 빌미로 ‘희생양’을 찾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그동안 미 재무부가 반기에 한번 의회에 제출하는 보고서는 ‘정치적 수사’에 그쳤지만 이번 보고서부터는 최악의 경우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미국 정부조달시장 참여가 금지되는 등 구체적인 ‘액션’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표적이 되는 국가는 외환시장 개입의 손발이 묶이고 최악의 경우 국제 환투기 세력의 집중 공세에 노출된다.
BHC법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과도하고 △경상흑자가 많으며 △일방향 환율 개입을 지속적으로 한 나라(세 가지 모두 충족)를 ‘심층조사국가’로 지정한 뒤 1년 동안 이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조치가 미흡하면 대통령이 구체적인 무역보복안을 내놓을 수 있게 했다. 이 조건에 해당하는 국가는 한국 외에도 다수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국가는 한정돼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당국 관계자는 “전 세계적으로 대미 무역흑자가 큰 나라는 중국·이스라엘·스위스·독일·일본·한국 등인데 이스라엘은 정치관계상 환율보고서로 비판할 수 없고 스위스는 통상 예외적인 국가로 미국이 치부했으며 독일은 유로화를 쓰고 있는데다 일본은 구두로 경고를 했지만 보고서를 통해서까지 비판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도 정치경제 역학상 대놓고 비판하기 힘들다”며 “남은 국가는 한국과 대만밖에 없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BHC법안 첫 발효로 어느 나라든 한두 나라는 중점 분석 대상국으로 지정해야 할 텐데 그게 한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외환시장에 일방향적인 개입은 없다며 자신하던 우리 외환당국에 최근 미묘한 변화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과거 사례를 봐도 그렇다. 미 재무부는 지난 1988년부터 매년 4월과 10월 개별 국가의 환율정책을 평가하고 올바른 정책방향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해왔다. 1988~1994년에 한국이 세 차례, 대만이 네 차례, 중국이 다섯 차례 ‘환율조작국’으로 지목됐으나 구체적인 제재는 없었으며 그 이후 지정된 국가는 없다. 한국이 환율보고서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 재무부의 반기 환율보고서는 이르면 이번주 중 발간돼 미 의회에 제출된다. 이번 환율보고서에서는 어떤 지표를 토대로 심층조사국가를 지정할지 가이드라인이 나오거나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심층조사국가가 지정될 수 있다. 보고서에 어느 정도의 내용이 담길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집중적으로 거론되는 국가는 환시장 개입의 손발이 묶이고 이를 노린 국제 환투기 수요로 인해 화폐가치가 급등하는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
특히 최근 미국이 엔저를 용인했던 일본에 날 선 발언을 쏟아내면서 환율보고서의 수위가 높아지고 조준국이 넓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제이컵 루 미 재무장관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과 양자면담을 갖고 “일본이 외환시장에 개입할 명분은 없다”며 엔저에 제동을 걸었다. 한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양적완화를 통해 달러 약세를 유도하면서 일본에는 엔화가 강세를 보여도 좀 버텨달라는 암묵적 사인을 보냈다. 이후 상황이 나아진 미국은 2012년 아베노믹스가 출범하며 엔저정책을 들고 나오자 과거의 은혜를 갚기 위해 묵인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런데 최근 미국이 일본의 엔저에 제동을 건 것은 더 이상의 엔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신호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제 상황도 환율보고서의 수위가 높아질 수 있다는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계속되는 달러 강세로 미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4분기 3.9%에서 올해 1·4분기에는 0.2%까지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미 경상 적자도 지난해 2.7%로 2014년 2.2%에서 불어나고 있다. 올해 말 치러지는 미 대선을 앞두고 대미 무역흑자국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커지는 것도 환율보고서 수위가 높아질 것이라는 해석을 낳고 있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한미 재무장관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의 환율정책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 정책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는 내용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이 역시 만에 하나 한국이 중점 분석 대상국으로 지목될 경우의 파장을 줄이려는 정무적 판단이었다는 후문이다.
/세종=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