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는 종합예술의 극치로 불린다. 연극과 미술, 음악, 철학 등 거의 모든 예술을 총 집합해 그것을 무대공연으로 만들어 청중에게 보이는 것이 오페라이기 때문이다.
바그너라는 작곡가가 있다. 오만과 독선은 물론 지나친 자기애로 지탄받았던 독일 태생의 음악가다. 그는 반유태주의적 인종주의자였고, 특히 여성 편력은 심각해 도덕과 윤리를 저버리는 일들도 서슴없이 행했다. 하지만 이런 결점을 잠시 눈감아두고 그의 음악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탈리아에 ‘오페라의 신’으로 추앙받는 쥬세페 베르디가 있다면 독일에는 바로 이 사람, 리하르트 바그너가 있다고까지 평가받는 걸출한 음악인인 것이다. 베르디에 빗대 일각에서는 바그너를 ‘오페라의 독재자’라고도 부른다.
바그너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19살 이후 장시간 떠돌이 생활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30대로 접어들어 독일 드레스덴의 궁정 오페라단 악장이 되어 작곡에 전념하면서 <탄호이저>, <로엔그린> 같은 대작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후 또다시 힘든 망명 생활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시기 바그너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확립하게 된다. 특히 대규모의 악극을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본인이 직접 대본을 쓰고 곡을 붙이는 작업을 통해 극과 음악이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고 청중들이 이야기와 음악의 상관관계 속에서 극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오페라는 오랜 기간 이탈리아의 방식을 따라 하고 있어서 아리아를 듣기 위해 오페라를 감상하는 스타일이 주를 이루었는데, 바그너는 이 형식이 극 진행을 방해한다는 신념으로 완전히 새로운 오페라를 창조했다. 이것이 바로 바그너의 ‘악극’이다.
그의 작품들은 워낙 스케일이 크고 방대해 현재도 무대에 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의 대표적인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는 라인의 황금·발퀴레·지그프리트·신들의 황혼이라는 4개의 오페라로 이뤄져 처음에는 제작 기간만 26년이 걸렸다고 한다. 당연히 비용도 많이 들었고, 바그너는 빚더미에 앉았다. 다행히 평소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던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2세가 창작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후원 하게 되면서 작품은 완성되었고, 바그너의 명성은 순식간에 전 유럽을 휩쓸게 된다.
베르디조차 평생 자신의 작품을 위한 전용 극장은 갖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자신의 극음악을 위한 전용 극장을 직접 건립하기도 했다. 이 ‘바이로트 축제 극장’에서는 현재까지도 매년 7월과 8월께면 오로지 바그너의 음악만을 위한 세계적인 축제가 개최돼 장장 30일 동안 매일 밤 그의 작품이 공연된다. (테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