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운업 구조조정을 떠안은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자본확충을 위해 최소 5조원의 출자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더하면 규모는 훨씬 더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는 모습이다.
26일 수은 등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9.89%(잠정치)인 수은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14%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약 5조원의 금액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BIS비율은 자기자본을 위험가중자산으로 나눈 비율로 은행의 건전성을 판단하는 척도다. 금융당국은 BIS 비율 14%를 산은과 수은 등 국책은행 건전성 지표의 마지노선으로 정해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산업은행의 BIS 비율이 14%로 큰 문제는 없지만 앞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 떨어질 수밖에 없어 건전성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며 “선제적으로 자금을 확충해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BIS 비율은 현재 수준이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한은·산은이 출자한 납입자본금 9조원을 포함한 수은의 자기자본은 11조원이다. 조선·해운업의 여신을 포함한 위험가중자산 규모는 120조원. 즉 BIS 비율은 약 10%(11조원/120조원)를 밑돈다. 이 BIS 비율을 14%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기자본을 16조원 이상 확보해야 한다. 결국 수은이 구조조정에 나서기도 전에 건전성 지표를 갖추는 데만 최소 5조원의 금액이 필요한 셈이다.
산은과 수은이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서면 금액은 더 불어난다. 정산여신으로 분류돼 있는 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의 여신등급을 고정 이하로 낮출 경우 이익잉여금을 털어내 막대한 충당금을 쌓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BIS 비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의 소피아 리 부사장도 이날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국책은행의 떠안은 부실채권의 증가 속도가 증자 속도보다 빠르다. 국책은행이 출자전환을 통해 한계기업을 지원하는 것도 자본 건전성 문제로 인해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수은은 지난해 STX조선의 여신을 고정 이하로 돌리면서 1조원이 넘는 충당금을 쌓았으며 당기순이익은 411억원으로 전년(853억원) 대비 반토막이 났다.
이렇다 보니 정부가 한은에 현행법 테두리 내에서 가능한 수은 출자를 포함해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과거 정부는 위기 때마다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했다. 1989년 주가 부양책으로 부실이 커진 투신사를 지원하기 위해 1992년 2조9,000억원어치 보유 국채를 매입해줬고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당시에도 제일은행과 종금사에 ‘특별 융자’ 명목으로 지원해줬다. 환매조건부채권(RP)을 통한 ‘타기팅’ 유동성 공급도 발권력 동원의 단골 메뉴다. 최근에는 새누리당이 총선 공약으로 ‘한국판 양적완화’를 내걸면서 한은법을 개정해 영리기업인 산은에 출자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금융당국은 이 같은 국책은행에 대한 지원은 철저한 자구 노력을 전제로 하겠다고 밝혔다. 임 위원장은 “국책 금융기관의 인력·조직 개편 및 자회사 신속 정리 등 자구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