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후드와 대헌장(Magna Carta), 십자군전쟁, 보르도 와인의 탄생과 백년전쟁, 심지어 산업혁명까지…. 별개의 사안으로 보이는 이들 사건들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1152년 5월18일, 푸아티에(오늘날 프랑스 중서부)에서 열린 ‘세기의 결혼’. 고귀한 혈통끼리 통혼이었으나 막상 결혼식에는 손님도 거창한 예식도 없었다. 간단한 혼인 서약으로 백년가약을 맺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30세 신부가 첫 남편과 헤어진 지 불과 8주 밖에 안 지난 이혼녀였다는 점. 11세 연하의 영국 왕자는 신이 났지만 신부의 사정은 달랐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갈라선 전 프랑스 왕비 아키텐의 엘리너(Eleanor of Aquitaine)는 교황청 이혼허가장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떠들썩한 혼인 잔치를 꺼렸다. 약식 결혼의 두 번째 이유는 보다 현실적이었다. 두려움 때문.
엘리너의 광대한 영지를 탐낸 이웃 귀족들의 침략을 막으려 유력 가문과 서둘러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 영지가 얼마나 컸기에 그랬을까. 형식상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던 엘리너 가문이 거느린 영토는 국왕의 직할령과 맞먹었다. 궁전문화와 예술, 생활 수준은 프랑스 왕실보다 앞섰다. 부유한 아키텐의 상속녀인 엘리너는 부친을 잃은 15살 때부터 유럽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엘리너의 부친인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는 임종 직전, 딸의 후견인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를 지목하고 눈을 감았다. 루이 6세는 엘리너를 둘째 아들 루이와 맺어줬다. 둘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거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17세 신랑 루이 왕자는 두 살 어린 신부와 결혼식 일주일 뒤에 부친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프랑스 국왕 자리를 물려 받았다.
루이 7세는 엘리너 왕비를 끔찍하게 아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이가 벌어졌다.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 결혼 7년 만에야 첫 딸 마리 출산. 부부가 함께 출전한 십자군 원정에서는 사이가 더욱 틀어졌다. 국왕은 엘리너 왕비가 숙부와 불륜 관계라고 의심했다. 병력 운용을 놓고도 사사건건 대립했던 두 사람은 이슬람 군대에 처절하게 패하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이혼을 말리는 교황청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합방한 끝에 엘리너가 임신해 호전됐던 관계도 잠시. 엘리너가 또 딸을 낳자 아들을 기대했던 루이 7세도 이혼에 동의했다. 교황청의 이혼 승인 이유는 근친 관계. 국왕 부부는 10촌 사이였다. 먼 친척이어서 근친에 해당되지 않았어도 엘리너의 이혼 신청을 기각했던 교황청은 달리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훗날 호사가들이 ‘중세의 섹스 심벌’로 불렀을 만큼 미모가 뛰어났고 막대한 재산까지 갖춘 이혼녀 엘리너는 또 다시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인근의 유력 귀족 두 명이 신부를 납치하려 군대를 보낼 것이라는 소문 속에 엘리너가 청혼 편지를 영국 왕자 헨리(프랑스식 이름은 앙리)에게 급히 보낼 때 주변에서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전남편인 루이 10세보다 가까운 친척(8촌)인데다 11살이나 어린 헨리 왕자는 첫 딸 마리의 사위감 물망에도 올랐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헨리 왕자의 부친(앙리 백작)과 엘리너가 한때 연인이었다는 루머도 뛰어 넘었던 두 사람은 남다른 금슬을 과시하며 13년 동안 5남 3녀를 낳았다. 문제는 결혼 2년 만에 영국 국왕 자리에 등극한 헨리 왕자의 여성 편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는 점. 어린 남편의 바람기에 질렸던 엘리너는 아들들을 키우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가장 아꼈던 아들은 리처드.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사자왕 리처드’으로 불리며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겨뤘던 인물이다.
프랑스 왕비로서 딸 둘, 영국 왕비로서 아들 다섯에 딸 셋을 낳았던 엘리너의 아이들은 세 살 때 죽은 맏아들을 빼고는 모두 장성한 가운데 딸들은 하나같이 주요 왕가로 시집갔다. ‘중세 말기 유럽 왕가의 할머니’로도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헨리 2세의 끝없는 바람기에 분노한 엘리너는 아들들을 부추겨 잇따라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 15년간의 감금생활 끝에 남편이 사망한 뒤 67세에야 풀려났다. 엘리너는 리처드 1세의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섭정으로 영국을 다스렸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포로로 잡힌 리처드 1세를 구출하려 막대한 보석금을 지참하고 대륙으로 건너가 아들을 빼내는 모성애도 보였다.
손자와 손녀들을 돌보려 80세 노구에도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엘리너가 82세로 사망할 때 남은 아이들은 존 왕과 딸 하나 밖에 없었다. 남편 둘과 아이 8명을 먼저 떠나 보낸 엘리너의 시대가 지난 뒤에도 프랑스 영역 내의 아키텐과 툴루즈·가스코뉴 등 영지는 영국에 충성을 보냈으나 결국은 영토분쟁을 낳고 116년 전쟁(백년전쟁)의 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보르도산 와인도 이 시기에 명성을 얻었다. 와인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영국의 엘리너와 그 자손들에게 보내지며 국제적 명성의 와인으로 굳어졌다.
연상의 이혼녀와 결혼으로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다는 아키텐을 획득했던 헨리 2세는 선진제도를 영국에 들여와 행정제도와 법체계를 다졌다. 오늘날 영국 재무부의 원형인 재무재판소를 설치하고 보통법 제도의 근간도 마련했다. 재산을 지닌 자유인이 신분에 맞는 무기를 소지하도록 의무화한 무장조례는 오늘날 미국의 총기소유 자유화로 이어지고 있다.
엘리너와 로빈 후드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전설로 전해지는 로빈 후드 설화에서 나쁜 왕으로 나오는 존 왕이 엘리너의 막내 아들, 위대한 군주로 등장하는 리처드 1세가 세째 아들이다. 존 왕은 프랑스내의 막대한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 스코틀랜드와도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 재정 위기를 맞았는데, 여기서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태동이라는 대헌장(1215년)이 나왔다. 전쟁 비용을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존 왕을 러니메드 숲으로 유인한 귀족들은 ‘국왕은 귀족과 성직자의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대헌장을 받아냈다. **
로빈 후드 전설에서의 존 왕과 리처드 왕의 이미지는 영토를 상실하고 세금을 짜내려던 국왕(존)에 대한 반감과 기사의 상징처럼 보였던 국왕(리처드)에 대한 기억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형제에게 영국인 피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프랑스화한 바이킹 출신 노르만족 혈통이 4분의 1, 프랑스 유력 가문의 피가 4분의 3이 섞였다.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리처드도 주로 아키텐지역에서 성장하고 일생을 보냈다.
프랑스와 영국의 왕비였던 엘리너의 흔적은 무수한 민요와 무훈시, 궁정 연애시에 남아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전기물이 출간되고 미국과 유럽의 TV와 영화의 소재로 관심이 이어진다. 대조적으로 연하의 남편인 헨리 2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고도로 효율적인 법률·행정 시스템을 구축한 군주라는 평가 이면에 광폭한 군주라는 혹평이 공존한다. 기사 4명을 보내 토머스 베케트 캔터베리 대주교 살해를 사주 내지는 방조한 탓이리라. 정치지도자의 악행은 선정보다 오래 기억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엘리너의 전남편인 루이 7세도 이혼 1년 뒤 33세 나이로 바르셀로나 출신인 13세 공주와 재혼, 3년이 지나 첫딸 마르그리트를 낳았다. 새로운 프랑스 왕비는 20세 때 둘째 딸을 출산하다 죽었다. 루이 7세는 두번째 아내 사망 5주 후에 세번째 아내를 맞아들였다. 둘째 아내와 동갑인 상파뉴 백작 가문 출신의 세번째 아내는 25세 때 루이 7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그가 명군으로 손꼽히는 ‘존엄왕’ 필리프 2세다.
얽히고 설킨 ‘고귀한 혼맥’의 끝판왕은 엘리너와 헨리 2세의 둘째 아들, ‘젊은 왕 헨리’와 루이 7세와 두번째 아내 사이의 첫째 딸 마르그리트가 결혼했다는 사실. 재혼한 부부끼리 각각 전남편과 전처의 딸과 아들을 상대로 장인이 되고 시어머니가 됐다는 얘기다. 정략 결혼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두 사람은 사이가 극히 안 좋아, 마르그리트가 출산을 이유로 파리로 돌아가 아이를 사산한 뒤부터 별거로 들어갔다. ‘젊은 왕 헨리’가 아버지 헨리 2세에 반란을 일으키고 실패한 끝에 상심 속에 살다 32세로 사망한 뒤 마르그리트는 헝가리 국왕과 재혼했다.
** 영국 민요에 로빈 후드 전설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4세기 중후반으로 실존 인물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리처드 왕과 존 왕이 왕권을 겨루던 당시 영국의 숲이 이미 황폐화하기 시작해 의적들이 몸을 숨기고 근거지를 마련할 대규모 숲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목재 자원이 고갈된 영국은 대헌장 서명 시기를 전후해 서민들의 난방용으로 연탄을 캐기 시작했고 탄광에 고이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 장치가 절실했다. 시간이 흘러 영국에서 처음 나온 증기기관은 모두 탄광의 배수용이었다. 증기기관은 18세기 초에야 나왔지만 탄광의 철로와 광차 등은 일찍부터 개발돼 증기기관이 운송의 도구로 확장되는 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