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1381년 영국 농민반란



1381년 5월 30일, 영국 서남부 에섹스주 브렌트우드. 농민들이 분노로 낫과 쟁기를 들었다.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잉글랜드 곳곳에서 농민들이 반란의 기치 아래 모였다. 원인은 세금.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스코틀랜드와 국경 분쟁으로 재정이 궁핍해진 영국 왕실은 1377년 가을, 의회를 설득해 거지를 제외한 14세 이상 성인 남자에게 4펜스를 징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전국적으로 실행된 일종의 인두세(人頭稅·오늘날 주민세와 비슷)인 이 세금은 반발을 불렀다. 불공평했던 탓이다. 부자나 가난뱅이나 똑같이 부과됐으니까. 조세 저항 기미가 보이자 영국 의회는 신분에 따른 차등 부과 방안을 실행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가진 자들이 오히려 더 안 냈다. 징수예상액을 5만 파운드로 잡았는데 실적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왕실이 빚더미에 오르자 영국은 1380년 논란 끝에 더욱 가혹한 조치를 들이댔다. 14세 이상 남녀 구분 없이 1인당 1실링의 인두세를 매긴 것이다.* 불공평한 과세에 불만이 높아지고 세수 실적이 신통치 않자 국왕의 직인을 소유한 징세관들이 마을을 훑었다. 브렌트우드에 도착한 징세관이 세금을 미납한 농부와 어부들을 소환해 납부를 독촉했을 때, 쌓였던 불만이 마침내 터졌다.

징세관이 납세 거부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순간 마을 주민 전체가 달려들었다. 징세관의 부하와 지방 배심원 6명이 주민들에게 참수 당했다. 농부와 어부들은 징세원들의 수급(首級)을 창대에 달아 마을을 돌며 조세 저항에 동조할 사람들을 모았다. 전국으로 퍼진 농민 봉기는 6월 초 11만명선으로 불어났다. **

농민군에는 기사와 자영농과 성직자도 따라붙었다. 도시 빈민들도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1351년 제정된 ‘노동자 조례’에 대한 불만이 컸던 탓이다. 노동자 조례란 흑사병이 창궐한 뒤 인구감소로 임금이 뛰자 귀족이 지배하는 의회가 ‘임금은 흑사병 이전보다 낮아야 한다’고 강제한 법률. 생활고에 시달리던 도시 빈민들이 농민 반란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봉기한 곳도 나타났다. ***

세력이 불어난 반란군의 깃발은 잉글랜드 전역의 3분의 2를 덮었다. 사기 충천한 반란군은 6월13일 런던에 진입했다. 성벽과 템즈강이라는 자연 해자(垓子)에 보호되던 런던의 성문도 농민반란군에 동정적인 시 행정관과 런던 시민의 호응 아래 열렸다. 강을 사이에 두고 국왕을 알현한 농민들의 요구는 ‘농노제 폐지와 토지 분배, 인두세를 추진한 간신배 척결’. 요구가 많아졌으나 왕은 농노해방헌장을 내렸다.

‘간신배들에 속았을 뿐, 국왕은 어리지만 우리 편’이라고 믿었던 농민군 일부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어린 국왕 리처드 2세(당시 만 13세)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간신들을 처단한다’며 남아 대주교와 재무장관을 죽이고 죄수들이 수감된 런던탑을 부쉈다. 런던 부자 지역에 거주하던 플랑드르(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 상인들도 ‘양을 기르기 위해 농토를 빼앗아 가는 악한 상인 무리’라는 이유로 떼죽임 당했다.


농민 반란은 절정의 순간에서 꺼져갔다. 옷 속에 장검을 감춘 기사 200명을 대동한 국왕과 귀족들은 회담장에 혼자 나타난 반란군 지도자 ‘와트 타일러’를 죽여버렸다. 소년 국왕은 태연하게 대기하고 있는 농민군을 광장으로 이끌었다. 와트 타일러가 죽은 줄 모르고 그에게 기사 서품이 내려질 것이라고 믿고 국왕을 따랐던 농민군 주력은 광장에서 대기 중이던 군대에 의해 최소한 1,500명이 죽었다. 구심점을 잃은 농민군은 지리멸렬, 반란은 끝났다. 농민에 대한 국왕의 모든 약속도 없던 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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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반란은 실패했어도 중세 장원제도의 해체와 자영농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전세계에서 농노가 가장 먼저 없어진 나라가 영국인 것도 진작부터 농노제 폐지를 외쳤던 농민 반란과 무관하지 않다. 농민과 런던시의 문을 열어준 도시노동자의 연합을 ‘최초의 노농(勞農) 소비에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와트와 함께 반란을 이끌다 처형 당한 사제 출신의 존 볼은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베옷을 짜던 시절, 누가 신사고 누가 농노였나.’ 기원전 209년 중국 진나라의 진승과 오광, 고려시대 노비였던 만적이 외친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더냐(王侯將相 寧有種乎)’와 같은 맥락이다.

635년 전 영국 농민반란의 호흡으로 오늘을 생각한다. 경제위기는 격렬한 계급투쟁을 낳았다. 흑사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 일손이 부족해지고 임금이 올랐지만 수입이 떨어진 영주와 국왕은 서로 주머니를 채우려 국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요즘은 어떠한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평등이 있는가. 계층마다 서로 자기 몫만 주장하던 사람들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논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인두세 징수 목표는 10만 파운드. 3년 전의 징수실적보다 4배나 많았다. 의회는 누진적인 인두세를 도입할 생각이었다. 애초 논의됐던 방안은 공작은 10마르크, 남작은 40실링, 14세 이상 남자는 4펜스 정도였으나 논의 과정에서 권문세가의 압력 속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금액을 내는 인두세로 바뀌었다. 더욱이 농부들의 세 부담은 사망세에 의해 더욱 무거워졌다. 농부가 죽으면 영주는 ‘군역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유로 가장 좋은 짐승을 가져갔다. 교회는 십일조를 다 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유로 두 번째로 좋은 짐승을 빼앗았다. 14세기 영국판 백골징포(白骨徵布)는 농민층을 가난에 빠뜨리고 결국 대규모 봉기를 부추겼다.

** 영국은 농민반란을 피할 수도 있었다. 정치의 일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크게 세 가지 고초를 겪고 있었다. 첫째는 흑사병. J.F.C. 해리스 서섹스대 교수의 ‘영국 민중사’에 따르면 1348년께 450만명 이상이던 영국 인구는 1377년에는 250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전염병으로 인력이 줄면서 급여가 올랐지만 세금 부담도 커졌다. 두 번째는 전쟁의 수렁. 크레시 전투와 프와티에 전투에서 보여줬던 파죽지세는 옛말이 되어 버렸고 오히려재해권을 장악한 프랑스 함대가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도시를 약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번째는 국정 동력의 상실. 백년전쟁의 서전에서 연전연승하며 영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에드워드 3세는 노년에 이르러 젊은 시녀(앨리스 페러즈)에게 빠져 정치에서 손을 놓고 왕관의 보석마저 빼줬다. 용맹했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는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상태. 에드워드의 동생인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아버지의 정부 페러스와 결탁해 부정 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혼란과 절망으로 가득한 영국에도 하원만큼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 따르면 100개의 성읍을 대표하는 공민 200명과 37개주를 대표하는 기사 74명으로 구성된 하원은 1373년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권력자인 랭카스터 공작 일당을 출석시켜 회계보고를 받고 늙은 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 요녀 앨리스 페러스의 파면 약속을 받아냈다.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한 해상 방위계획도 마련했다. 영국사에 ‘모범의회’로 기록된 당시 하원의 결정이 이뤄졌다면 대규모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범의회’가 회기를 마치고 해산되자 랭카스터 공작 ‘켄트의 존’은 하원의장을 투옥하고 국왕을 다시는 모시지 않겠다고 서약했던 앨리스 페러즈도 국왕의 침실로 되돌아갔다. 이 여인을 파문하겠다고 약속했던 주교들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수포로 돌아간 개혁이 끝내 대규모 반란을 부른 셈이다.

*** 웬체스터 지방 탈곡 인부의 임금은 1301년 하루 6.51 펜스에서 1351년에는 13.02 펜스로 치솟았으나 ‘노동자조례’의 영향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난 1381년에는 10.82 펜스 수준으로 다소 내렸다. 목공이나 막노동자 등의 임금도 비슷한 추이를 보였다. 의회는 임금이 올랐으니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봤으나 귀족과 영주, 교회가 갖은 방법으로 세금을 올려 왔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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