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초호화판 정상회담



1520년 6월7일, 프랑스 서북부 발링헴(Balinghem). 온통 금으로 치장한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만났다. 정상회담을 위해 중립지대에 도착한 것이다. 영국의 헨리 8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는 갑자기 대오를 이탈해 단기로 말을 달렸다. 중간에서 만난 두 국왕은 마상에서 세 번, 땅에 내려서 한번 포옹했다.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정상회담이라는 ‘황금천 들판의 회담(Meeting on the Field of Cloth of Gold)’이 시작된 순간이다.

‘황금천 들판의 회담’.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당시 영국의 영향권이던 발링헴 지역은 원래 허허벌판이었으나 정상회담이 결정된 이래 모든 게 바뀌었다. 헨리 8세 일행은 들판이 온통 황금으로 보일 만큼 수많은 천막을 금으로 발랐다. 목재 골조 위에 금박을 입힌 천을 두른 반영구적 건물이 2,800채나 들어섰다. 연회장으로 쓰려고 146평 짜리 천막도 세웠다. 호사가들은 황금천 들판(또는 금란의 언덕)을 ‘세계 제 8대 불가사의’라고 불렀다.


헨리 8세의 유럽 본토 행은 출발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우선 규모가 컸다. 국왕 수행원만 4,500여명. 캐서린 왕비에게도 수행원 1,200명이 딸렸다. 5,700여명의 인원과 말 3,000마리를 프랑스내 영국령으로 이동시키는데 27척의 해군 함정이 동원됐다. 동맹을 모색하기 위한 정상회담에서 영국은 국위를 과시하려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 헨리 8세가 타는 말을 치장하는 데도 대형 진주 1,100개와 56㎏의 금이 들어갔다.

헨리 8세(당시 29세)보다 세살 어렸던 프랑수와 1세도 마찬가지. 프랑스의 국위를 과시하려 임시궁전과 텐트에 금실을 두르고 금가루를 발랐다. 말단 하인들에게도 평소와 달리 금색 옷을 입혔다. 연간 가용예산이 11만파운드였던 영국은 이 행사를 위해 적어도 5만파운드 이상을 지출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수와 1세는 재정능력이 연간 35만 파운드에 달했으나 여유는 없었다. 최대의 가상 적국인 스페인과 전쟁에 대비해 재정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거액을 들여 초호화판 정상회담을 가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랑수아 1세는 숙적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국이 필요했다. 오랜 내전(장미전쟁) 끝에 등장한 튜더왕조의 두 번째 왕인 헨리 8세는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강대국 프랑스 국왕과 대등한 군주임을 증빙할 이벤트에 아낌없이 돈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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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에 비해 5분의 1 수준인 영국으로서는 중간자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다면 지출이 아깝지 않았다. 영국의 신민들도 헨리 8세의 초호화판 외유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프랑스와 100년 전쟁으로 유럽 내 영토를 모두 상실한 마당에 얼마 남지 않은 유럽 영토에서 국왕이 영국의 풍요를 뽐낸다는 데 자부심까지 느꼈다. 헨리 8세에게 ‘황금천 들판의 회담’은 내부통치용이기도 했던 셈이다.

두 개의 분수대가 적포도주를 뿜어내는 가운데 두 국왕이 레슬링까지 하며 우의를 다졌던 17일간의 회동 결과는 영국의 승리. 프랑스의 애를 태우며 동맹을 맺지 않은 영국은 에스파냐로부터 더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영국 수출품의 주력인 양모의 90%가 에스파냐 치하의 네덜란드로 팔려나간다는 점에서 영불동맹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국익을 위해 고착된 동맹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유럽대륙의 각국과 합종연횡한다는 영국 외교정책의 전통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요즘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해마다 재연되는 496년 전 황금천 들판 정상회담의 밑바탕에는 약자의 실용외교 노선이 깔려 있다. 인구와 재정 규모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상대가 안되던 영국은 황금천 들판의 실용 외교 이후 3세기가 지난 뒤에는 모두를 압도하는 대국으로 우뚝 섰다.

대통령들의 외국 순방이 잦을 때마다 버릇처럼 머리 속의 주판알이 굴러간다. 경비는 얼마나 썼고 그만큼의 과실을 거뒀나. 외유를 마치고 나면 으레 ‘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뒀다’는 자화자찬이 따라 붙는데 정말로 그런가. 실용 외교의 현주소는 더욱 더 궁금하다. 강대국의 편가르기 논리에 함몰돼 한국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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