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초인종이 울린다. 늦게 잠든 터라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데 짜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문 앞에는 늙은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무너질 듯 서 계셨다. 아버지는 1934년생.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전혀 다정한 분이 아니었다.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지만 아쉽지도 않았다. 재작년 담도암이 발견됐고 항암치료로 전이는 막았지만 부작용으로 선망 증상이 생겼다.
평생의 고생이 한으로만 침전됐는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씀이 거칠기도 해 곁에 잠시 머무는 것도 힘들었다. 전부 어디로 숨어버렸는데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쇠잔한 노인을 앞에 둔 새벽녘은 절망스러웠다. 과음한 다음 날도 새벽 네 시면 예외 없이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조간신문을 읽던 아버지다. 이제는 뿌옇게 흐려져 버린 그에게 나는 들어오시라는 말도 못했다.
힘겹게 운전해 비실비실 돌아온 집에는 여덟 살, 여섯 살인 두 아이가 향기로운 온기를 머금고 잠들어 있었다. 가닿을 수 없는 아버지의 회한과 이해할 수 없는 녀석들의 보드라운 생명력 앞에서 나는 아득했다.
유난히 사고가 많은 요즘이다. 서울 강남역과 구의역에서 사람이 죽었고 또 다른 많은 사람이 생을 달리했다. 사람 사이에 혐오가 끼어들고 증오와 분노가 똬리를 튼다.
비용과 편익·효율성에 근거한 공리주의적 해법과 무릇 침범할 수 없는 가치의 실재를 주장하는 항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충돌한다. 싸움은 싸움을 낳고 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적인 처방은 또다시 순연된다. ‘절대’가 있을 수 없고 ‘완벽’은 꿈꿀 수 있을 뿐이라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대화일 뿐인데도 말이 귀에 닿지 못하고 마음은 이야기에 문을 닫는다. 그렇다면 절망은 모두의 몫이다.
혼돈일 뿐인 아버지의 말끝을 억지로라도 붙들고 한 시간만 대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디가 불편하신 건지 뭘 잡숫고 싶은지 듣고 싶다. 평생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부자지간은 아니지만 마침내 그것 때문인가. 솔직히 말하면 가여워서다. 늙은 아버지가 가엾고 그와 말하지 못하는 내가 안쓰럽고 부스스 눈 뜬 내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이 슬프다. 할 수 있을 때 더 말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