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8일 오후 4시58분 구의역에 진입하던 열차 기관사가 역내 스크린도어 1개가 열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관사는 관제실에 “구의역 5-1 승강장 스크린도어가 고장난 것 같으니 로그 기록을 확인해 수리하라”고 신고했다. 관제실은 즉시 역무자동화 통제실에 이 사실을 알렸고 통제실은 1분 뒤인 오후 4시59분 스크린도어 정비용역업체인 은성PSD에 고장 사실을 통보했다. 출동 지시를 받은 김군은 곧바로 구의역 역무실에 들러 고장 지점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5-3 승강장과 9-4 승강장 스크린도어에서 이상 신호를 확인한 김군은 마스터키를 가지고 승강장에 올라갔다. 오후 5시50분, 5-3 승강장에서 김군은 도어 옆면에 달린 센서를 수건으로 닦아내 이물질을 제거했다. 30초쯤 지났을까. 장비를 챙긴 김군은 오후 5시54분 9-4 승강장으로 향했다. 김군이 9-4 도어 옆면에 달린 센서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던 순간에 열차는 구의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5시 57분경 역으로 들어온 열차를 피하지 못한 김군, 꽃 같은 그의 생명은 그렇게 꺾이고 말았다.
구의역 그리고 강남역을 가득 채운 포스트잇. 그렇게 그곳은 ‘광장’이 되었다. |
저항의 광장 → 공감과 연대의 장(場)으로!
같은 달 30일, 김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한 시민들이 하나 둘씩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포스트잇에 짧은 편지를 써 붙이기 시작했다. 사고가 일어난 구의역 9-4 승강장을 빼곡히 메운 포스트잇은 8-3부터 10-2 승강장까지 번졌다.
“열심히, 성실히 살아가려는 청년들에게 대한민국은 아무 것도. 새로운 세상에서는 부디 힘든 일, 아픈 일 없이 생을 보내길.”
“19살 친구 많이 아팠죠?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맘껏 꿈꿀 수 있는 곳에서 행복해주세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시민은 바보가 아니에요. 애한테만 떠넘기려 하지 말아요. 애는 일한 것 뿐이잖아요. 같은 또래로서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구의역 플랫폼은 그렇게 ‘광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광장은 전통적으로 저항과 결집의 상징이다. 시간을 거슬러 1987년 6월 10일, 시민들은 너도 나도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가슴에 품고 있던 흰 손수건을 꺼내 흔들었다. 옆에 선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걸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의 주최로 ‘6·10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시민들이 광장에 집결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1987년 1월 13일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같은 학교 선배인 박종운을 잡으려는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온갖 고문을 당하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당시 경찰은 “탁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국민은 분노했고 이를 계기로 국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가 6월 10일 전국적인 국민 대회를 마련했다.
국민대회 전날인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연세대 재학생 이한열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리고 경찰이 쏜 최루탄을 정면으로 맞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정신을 잃고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양손으로 안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위 참가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대한민국의 분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광장은 저항의 공간이자 동시에 변화를 이끌어내는 공간이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가능했던 것도 광장이라는 공간이 가진 힘 덕분이었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광장의 메아리, 1987년 VS 2016년
29년 전이나 지금이나 ‘광장’은 여전히 저항 공간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다만 광장에 집결하는 방식은 확연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이른바 지역별, 학교별로 비밀리에 장소 공지를 받아 기습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결집하는 모든 행위는 불법 시위로 규정됐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시간이나 장소 등 비밀을 유지하려던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다.
2016년의 광장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으로 구분된다. 지리적·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온라인 광장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가감 없이 의견을 전달할 수 있고 언제든 그만둘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오프라인 광장과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았다. 온라인 광장은 오프라인 광장에서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한, 사전 집결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5월 28일 구의역에서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난 김군, 앞서 5월 17일 강남역에서 희생 당한 혜원씨(가명)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온라인에서 먼저 불붙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앞다퉈 해당 사건을 공유했고 개인 계정을 통해 추모 글이 하나 둘씩 올라왔다. 온라인 특유의 공유와 공감에 힘입어 추모 열기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다.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시민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연일 보도하며 온라인 광장은 오프라인으로 확장됐다.
대자보가 촛불로, 그리고 노란 리본으로…시민, 목소리를 내다
#지난 2008년 청계광장이 수만 개의 불빛으로 가득 찼다. 한 손에는 초를 들고 한 손에는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교복을 입은 앳된 학생들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마스크를 쓰고 침묵을 강요하는 정부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 맞은 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노란 파도가 출렁거렸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그에게 못 다한 말을 적은 노란 리본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담기에 우리 그릇이 너무 작았습니다.’
5년 뒤 2014년에도 노란 리본이 나부꼈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에서 침몰한 세월호.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황망함 속에 힘겨운 기다림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발 돌아와다오” 가족의 절규와 오열이 “어떻게든 돌아와다오” 라는 간절한 바람이 될 때까지, 그 곁을 함께 지킨 시민들은 무사귀환을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노란 리본을 달았다. 팽목항에서 시작한 노란 물결은 전국 곳곳의 광장으로 퍼져 나갔다.
대한민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맞닥뜨릴 때마다 시민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목소리를 냈다. 수십 년 전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 나붙던 대자보가 2008년 촛불로 2009년과 2014년 노란 리본으로 표현 방식을 달리했을 뿐이다. 시민운동에서 다소 소극적인 부류에 속하던 여성이나 10대 학생들이 대거 광장으로 뛰쳐나온 것도 이쯤부터다.
2014년 노란 리본은 대한문에서 다시 한번 나부꼈다.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며 전국 곳곳의 광장에 노란 물결이 일었다. |
2016년 포스트잇 추모를 통해 구조적 모순을 꾸짖다
“나도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운이 좋아 살아 남았다”
“여자라서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 남은 자들의 몫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포스트잇 추모가 시작된 것은 2016년 5월 17일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부터다. 시민들은 황망하게 떠난 혜원씨가 단순히 ‘묻지마 범죄’에 노출된 희생자라고 보지 않았다. 강남역 사건은 피해자 혜원씨만의 문제나 일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깔렸다. 여성혐오냐 정신질환 범죄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은 일상생활에서 느낀 불안감을 털어놨고, 남성은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사회를 목소리 높여 비판했다. 혜원씨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는 2016년 포스트잇의 노란 물결을 만들어냈다.
같은 달 28일 오후 5시 57분 구의역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죽음. 부주의해서라거나 근무태도가 태만해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일하고 너무 성실했기 때문에 비극이 벌어졌다. 고인의 가방에는 뜯지 못한 컵라면이 남아 있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던 그의 삶이 그대로 그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열차에 치인 게 아니라 모순덩어리로 점철된 한국 사회의 구조에 의해 희생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시민들은 또 한번 포스트잇을 꺼냈다.
강남역에서도, 구의역에서도, 진도 팽목항에서도 ‘미안합니다’라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메모가 깊은 울림을 준다.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적 모순을 규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다짐. 더 이상은 간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대한민국’이어서 미안하다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노란 물결은 그렇게 소리 없이 웅변하고 있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