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네이스비 전투 승리의 비결은?



1645년 6월14일 새벽, 영국 중부 노샘프턴셔 카운티 네이즈비(Naseby). 왕당파와 의회군이 맞붙었다. 병력 차이 7,400명 대 1만3,500명. 의회군이 두 배 이상 많았다. 국왕 찰스 1세는 병력 열세에도 승리를 믿었다. 주력이 기병대였기 때문이다. 기병대 병력에서도 적었지만(의회군 6,000기 대 왕당파군 4,100기) 병력의 질(質)은 훨씬 뛰어나다고 여겼다.

찰스 1세의 자신감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없지 않았다. 왕당파 기병대의 주력은 귀족이나 젠트리 자제로 구성돼 승마 경험이 풍부했다. 더욱이 기마전술로 유명한 지휘관도 있었다. 라인의 루퍼트 왕자. 국왕 찰스 1세의 친동생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보헤미아 왕국의 선제후 프레드릭 5세 사이의 넷째 아들로 국왕의 외조카였다. 네이즈비 전투 당시 26세였으나 4년 전부터 내전에 참전, 기병대 지휘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전투 초기 양상은 찰스 1세의 기대대로 펼쳐졌다. 의회군 기병대 좌익이 루퍼트 왕자의 기병대가 펼친 기만 및 매복 전술에 걸려 들어 순식간에 300여기를 잃었다. 신앙심으로 무장한 신교도 젊은이들로 구성된 의회군 보병대의 제 1진도 왕당파군 보병대에 밀렸다. 패배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고참병 위주인 의회군 보병대 제 2진이 버텨내는 동안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 우익 기병대가 왕당파 보병을 짓밟았다.

결국 의회군은 전투 초반 400여명의 전사자를 냈으나 반격에 성공, 찰스 1세의 군대를 런던 북부에서 몰아냈다. 왕당파군 피해는 1,000명 전사에 포로 5,000여명. 영국 내전의 주도권도 네이스비 전투 이후 의회군으로 넘어갔다. 의회군은 전투 뒤에 전장을 정리하면서 국왕이 아일랜드와 덴마크, 프랑스군을 내전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기밀문서까지 찾아냈다. 기밀문서의 내용이 공개되며 ‘그래도 국왕은 국왕’이라며 타협을 주장하던 대화파들의 입지도 좁아졌다.

왕당파군은 왜 초전의 분위기를 이어나가지 못했을까. 루퍼트 왕자가 지휘하는 기병대가 당시의 여느 군대와 다름없이 약탈에 눈이 멀었던 탓이다. 의회파 기병대 좌익의 선봉을 무너뜨린 루퍼트의 기병들은 값비싼 말이며 마구(馬具)들을 챙기려 말에서 내려 ‘개처럼’ 땅바닥을 훑었다. 만약 왕당파 기병대가 승세를 몰아 다른 의회군에게 진격했다면 승패는 뒤바뀔 수도 있었다. 전장에서의 엄정한 군기가 승패를 가른 셈이다.

네이스비 전투의 숨겨진 요인은 또 있다. 군제 개혁을 통해 새롭게 편성된 ‘신형군(New Model Army)’의 존재. 네이스비 전투 이후부터 ‘의회의 신형군은 상승군(常勝軍)’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올리버 크롬웰이 편성한 ‘철기병(Ironsides·간단한 갑옷에 권총과 장검으로 무장한 경기병)’을 확대 개편한 신형군은 이후에도 의회군과 왕당파의 대립, 의회군의 아일랜드 정복에서 맹위를 떨쳤다.**


의회군의 핵심인 신형군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승리의 주역이라는 해석이 주류인 가운데 그리 특출한 군대는 아니었다는 혹평이 상존한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신형군의 보급 및 처우가 어떤 군대보다 좋았다는 점이다. 굶거나 약속된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당시 군대와 달리 신형군은 정기적으로 꼬박 꼬박 급료를 받은 상비군이었다. 네이스비 전투 직전인 1645년 3월에 발동된 국왕파 재산 몰수법으로 모인 재물을 의회는 신형군 편성에 쏟아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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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즈비 전투의 향방을 결정한 신형군의 주력은 중산층. 크롬웰은 말을 탈 수 있는 정도의 자영농 자제들에게 양질의 총칼과 장비를 제공하고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시켰다.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의 지휘관이던 크롬웰이 중산층 중심의 신형군으로 귀족 위주의 왕당파군에게 연전연승한 끝에 호국경 자리까지 올랐다. 군제와 의식의 개혁이 없었다면 의회군의 승리와 공화정은 물론 영국의 번영을 이끈 크롬웰의 항해법도 태동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신형군은 왕정복고 이후 해산됐으나 레드 코트를 비롯한 신형군의 특징은 영국 육군의 전통으로 내려온다. 영국의 민주주의 전통 밑바닥에도 신형군의 흔적이 스며 있다. 반짝한 뒤 사라졌으나 신형군의 하급 병사들이 모든 사람의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던 수평파 운동은 민주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네이즈비 전투는 단순한 옛날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 생각해 본다. 주머니는 비어가고 무수한 문제점이 드러나도 반성의 기미가 없던 17세기 영국 왕당파와 개혁과 혁신, 새로운 재원 발굴에 애쓰던 신형군. 우리는 과연 둘 중의 어느 쪽과 닮은 꼴일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왕립학회의 창설에도 영향을 미쳤던 루퍼트 왕자의 이름을 딴 흔적이 영국과 캐나다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은 프린스 루퍼트 항구.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주의 항구도시인 프린스 루퍼트 항구는 한국과 북미를 잇는 최단거리의 항구다. 시애틀과 빅토리아(캐나다)항구의 넘쳐나던 물동량을 소화할만한 대체 항구로 각광받았으나 국제 교역량 증가세가 주춤하고 관심이 다소 식은 상태다.

** 크롬웰이 지휘하는 신형군은 전투에 승리한 뒤에도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던 약탈을 자행하지 않는 엄정한 군기로 영국인들의 인심을 샀디. 그러나 아일랜드 원정에서는 정반대의 군대로 돌변해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영국 신형군의 폭압은 아일랜드를 한 수 아래로 보는 우월감과 아일랜드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증오가 복합 작용했다.

*** 국왕과 의회,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며 무장중립을 유지하던 영국 남부는 신형군이 진주했을 때 적대하기는커녕 적극 반겼다. 신형군이 식량과 건초를 조달하고 잠자리를 구하면서 적절한 대가를 지불한 덕분이다. 2,400여전 전의 세상을 살았던 투키디데스는 ‘필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전투의 승리는 약탈한 자본이 아니라 축적된 자본의 힘에서 나온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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