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베이면 저절로 낫질 않아요. 그래도 사람들은 자꾸 잊으려고만 하죠. 상처를 보는 게 너무 아프니까. 다쳤다는 걸 기억에서 지우고 자꾸 포장하는 거예요. 제가 20여년동안 그렇게 살았어요. 마음의 상처가 썩고 곪아서 결국 20대때 26㎏까지 살이 빠졌죠.”
우리 주변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평생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사는 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유아기 시절 경험한 마음의 상처를 씻지 못했던 심정선(46·사진)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이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 고통의 질곡을 헤쳐나올까. 그 감정선을 따라가 보기 위해 지난 13일 심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마음을 이해하고 치유하기 시작하면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는 심씨.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 병원에서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좋다는 약은 다 써봤고 온 몸에 뜸도 3,600방 떴지만 차도가 없었다고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게 심리치료였다.
심씨는 서점에 있는 심리 책을 모조리 독파했지만 내 얘기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없었다고 말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부터다. 2005년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음악치료, 동작치료 등도 병행했다.
“상담을 받으면서 깨닫게 된 건 ‘내가 다섯 살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저는 딱 다섯 살이었어요.”
심씨는 가장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을 통해 내면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상담을 받다 보니 ‘그 날’이 자꾸 떠올랐다는 것이다.
“다섯 살 때 엄마 손을 잡고 밤 기차에 올랐어요.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요. 부산에 가는 길이었죠. 주변 아저씨, 아줌마들이 어린애가 있으니까 과자도 주고 삶은 계란도 꺼내서 줬어요. 너무 맛있어서 황홀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렵게 자라서 마음껏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이었거든요. 그 때 엄마가 애 버릇 나빠진다고 아저씨, 아줌마들을 쫓아 냈어요. 더 먹고 싶었는데 어린 마음에 너무 서운했어요. 그리고 무서웠어요.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아저씨, 아줌마 저 좀 살려달라고, 우리 엄마 죽으러 가는 거니까 좀 말려달라고’ 목구멍까지 차 올랐는데 차마 꺼내질 못했어요.”
밤기차에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그에게 트라우마를 만들었다. 심리상담을 받기 전까지 그는 영도다리 위의 불빛, 밤 기차의 따스한 색감, 사람들의 정겨운 목소리로만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아름다운 동화라고 생각하고 싶었나 봐요.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동화인데요. 영도다리 위를 걷다가 엄마가 나를 안고 많이 울었죠. 그 때 살았구나 생각했어요. 다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살아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라고요”
심씨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건 2012년이다. 평소처럼 집단 심리치료를 받다가 심씨는 불현듯 지금 이 말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무작정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들어줬어요. 그 밤 기차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했어요.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그 때 함께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원형으로 심씨를 둘러싸고 앉아 “괜찮아, 괜찮아. 너는 안전해”라고 말했다. 심씨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박힌 큰 못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치료를 받으면서 수도 없이 했던 말이었어요. 살려달라. 그런데 그 날은 좀 달랐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달랐어요. 정말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 돌아오는 길 ‘아, 나 이제 살 수 있겠구나. 정말 괜찮아 지겠구나’라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건강도 차츰 회복하기 시작했다.
“의지가 생긴 것 같아요. 마음의 병이 낫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요.”
심씨는 본인의 경험담을 토대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누구보다 아프게 살았잖아요. 제 이야기를 전해서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주고 싶어요.”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