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2,000㎞와 1만5,000㎞. 전자는 부산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바닷길의 거리다. 후자도 마찬가지. 둘의 차이는 항로에 있다. 후자는 부산을 출발해 베링해협을 거치는 북극항로. 아직 정기항로가 개설되지는 않았지만 거리가 짧다. 수에즈 운하 통과 비용을 빼면 운임은 반 값 이하다. 동아시아와 유럽 간 교역 루트로 북극항로가 주목받은 시기는 500년 전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탐험가들이 끊임없이 나섰다. 아시아와 무역하고 싶었으나 포르투갈에 막혔던 상황. 영국 왕실과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보조금과 상금을 내걸었다. 영국은 캐나다 쪽에서 북극을 통과하는 북서항로를, 네덜란드는 북해에서 계속 북쪽으로 항해해 북극에 이르는 북동항로를 노크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는 당연지사고 실종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혹독한 추위 탓이다.
네덜란드의 지도제작자이며 탐험가·무역선장 출신 빌렘 바렌츠(Willem Barrents)의 1596년 3차 탐험도 그랬다. 따뜻한 계절의 항해를 위해 5월 중순에 출항, 북위 74도 선까지 비교적 순항했으나 7월 초순께 배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빙하와 유빙에 걸린 배는 시간이 갈수록 얼음에 조여들었다. 결국 바렌츠 선장은 얼음에 갇혀 쪼개지는 배를 포기하고 육지로 짐과 필수품을 날랐다.
네덜란드(북부 7개주 연합)에서도 바렌츠의 항해는 명운을 건 프로젝트였다. 바렌츠 선장은 1594년 1차 항해에서 이미 노바야젬라 제도(諸島)에 도달하고 주변 섬들을 발견해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 이듬해인 1595년 2차 항해에서는 마우리츠 총독의 지원 아래 5척의 선단을 지원받기도 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와중에서도 국가적 지원을 받았던 2차 탐험은 이상 저온 현상으로 실패.
국가의 지원 없이 암스테르담 상인들의 후원으로 2년 만에 재개된 3차 탐험에서도 바렌츠는 확신이 있었다. 여름철이면 24시간 낮이 지속되는 ‘백야 현상’에 따라 북극해 어디인가에 얼지 않는 바다가 있다고 여겼다. 굳이 북위 90도, 즉 북극점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중국의 동쪽에 도달할 항로의 존재를 믿었던 것. 막상 바렌츠 일행 앞에 나타난 겨울과 추위는 모든 걸 얼렸다. 바다는 물론 배까지.
바렌츠 선장 일행은 육지의 동토에 올랐다. 배의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지은 일행은 식량이 떨어지자 1년여 동안 북극 곰 3마리와 여우 26마리를 잡아 먹으며 버텼으나 대원 2명을 잃었다. 바다의 얼음이 풀린 이듬해 초여름, 4m짜리 소형 보트 두 척에 나눠 타고 귀로에 나선지 일주일 만인 1597년6월20일, 쇠약해진 바렌트 선장도 숨을 거뒀다. 47년 짧은 생을 보낸 바렌츠는 5·10·20유로짜리 동전에 영원히 살아 있다.**
덮개도 없는 소형 보트에서 븍극해를 떠다니던 바렌츠 선장의 남은 일행은 8월 중순, 러시아 어부들에게 구조돼 11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항해 도중에 3명이 추가로 죽어 바렌츠와 한 배에 올랐던 17명 중에 12명만 돌아왔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바렌츠 탐험대는 네덜란드에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줬다고 한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목숨을 버려도 화물은 지켰다’는 것이다.
중국 국영 CCTV가 2006년 말부터 방영한 1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堀起)에 따르면 바렌츠 선단의 선원들은 위탁화물을 온전한 상태로 화주에게 돌려줬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가면서도 투자자들이 맡겼던 옷과 약품 등 위탁화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CCTV는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명예의식과 상도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이 꽃피었다고 강조했다.***
바렌츠의 세 차례 항해는 단기 손익계산서로 살펴봐도 실패가 아니었다. 바렌츠가 발견한 스피츠베르겐을 비롯한 북극해의 섬에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등의 포경선을 비롯한 어선단이 찾아들었다. 바렌츠 탐험대가 남긴 꼼꼼한 기록은 심지어 ‘비타민 A 과잉증(A-hypervitaminosis)’을 의학적으로 규명하는 자료로 쓰일 만큼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바렌츠가 1차 탐험에서 발견하고 3차탐험에서 죽은 노바야젬라 제도는 구 소련의 핵실험 장소로 유명했다. 1961년 10월 말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탄이라는 ‘차르의 폭탄(Tsar Bomba)’을 실험했다.**** 냉전기간 중에 구 소련은 이 지역에서 224회에 걸쳐 265메가톤에 달하는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전해진다.
바렌츠 선장이 노바야젬라로 가기 전에 들렀던 노르웨이령 스피츠베르겐섬의 스발바르(Svalbard)에는 ‘최후의 날 저장고(Doomsday Vault)’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씨앗을 한 종에 500개씩 모아 보존한다는 것이다. 2008년 채집이 시작된 이 저장고에는 벌써 전세계 씨앗의 3분의 1이 모였다.
머리 속의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바렌츠 선장이 이를 봤다면 뭐라고 할까. 한쪽에서는 지구를 파괴할 핵무기가 실험되고 그 인근에서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씨앗을 모으는 ’식물판 노아의 방주‘가 건설되는 현실. 핵실험은 냉전 시대의 유산이고 ‘둠즈데이 발트’는 현재 진행형이니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일까. 빙하가 녹아 바렌츠가 그토록 목을 걸었던 북극 항로가 열리게 된 지금 상황은 축복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련의 시작일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당시에는 네덜란드라는 국가도, 같은 나라라는 인식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은 저지대 지역.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던 도시국가나 주(州)들의 연합체이던 이 지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금 부과에 항의, 80년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독립할 수 있었다. 북극 항로를 찾으려던 시기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나서기 전이다. 네덜란드가 국제적으로 독립을 공인받는 것은 1648년. 독일 30년 전쟁을 매듭 짓는 국제조약인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았다.(스위스도 이때 독립 국가로 공인받았다)
** 바렌츠 선장의 모험담은 1·2차 탐험에 동행했던 린스호텐과 2·3차 탐험대의 선상 목수 드 비르 두 사람에 의해 ‘바렌츠 선장의 3차례 항해’라는 이름으로 발간됐다. 바렌츠 선장의 이름은 북극 인근의 ‘바렌츠해’에도 남아 있다. 19세기말 네덜란드 선원학교의 이름도 바렌츠 학교였다.
*** 위탁화물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영어권 자료는 거의 없다. ‘탐험선단에 위탁화물이 있었을까’, ‘덮개도 없는 소형 보트에 화물을 얼마나 적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자료를 뒤졌으나 해답을 얻지 못했다. 일본어 자료도 없었다. 반면 중국어 자료는 적지 않으나 대부분 CCTV가 방영한 내용을 옮긴 정도다. 관련 연구가 뒤따르기를 바란다.
**** ‘차르의 폭탄(Tsar Bomba)’은 당초에 100메가톤으로 설계됐으나 구 소련은 52메가톤으로 위력을 줄여 실험했다. 미국의 수소폭탄 가운데 폭발력이 최대치인 폭탄은 25 메가톤. 구 소련의 핵탄두들이 미국제보다 탄두 위력이 훨씬 컸는데 대륙간탄도탄(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탄(SLBM)의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탄두 위력을 키워서 부근에 ‘스쳐 맞아도’ 목표물을 타격하자는 무식한 발상이다. 소련이 탄두를 이렇게 키운 이유에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체증의 법칙도 작용했다. 1메가톤까지 탄두 위력을 키우는 데는 돈이 점점 많이 필요하지만 1메가톤 이상부터는 제작 비용이 거의 차이가 없었기에 구 소련이 예산 걱정 없이 위력이 강한 탄두를 많이 생산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