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신(新)고립주의가 퍼지며 글로벌 통상전쟁이 한풀 꺾이면서 우리 정부가 한숨을 돌리게 됐다. 올해 초 세계에서 가장 개방도가 큰 자유무역협정(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서명될 때만 해도 출범 국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질타를 받았는데 지금은 되레 TPP의 비준마저 불투명해지면서 시간을 벌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메가 FTA 체결이 늦춰질수록 이미 세계 최고의 FTA망을 갖춘 우리가 유리해지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3일 복수의 한 정부 관계자는 “(TPP) 상황이 바뀌었다”면서 “하반기 내에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TPP 가입을 위해 구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TTP는 미국·일본·캐나다·멕시코·호주·베트남 등 아시아태평양 12개국 간 FTA로 역내 국가들의 경제 규모(GDP)는 전 세계의 40%에 육박한다. TPP의 시장 개방도는 98%, 공산품 개방도는 거의 100%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화율이 높다고 평가 받는 한미 FTA 이상이다. 특히 TPP는 12개 회원국가에서 조달한 원재료가 일정 비율 이상이면 역내산으로 인정하고 관세혜택을 주는 누적 원산지를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TPP 가입국 사이 ‘원재료-중간재-완성품’으로 이어지는 역내 분업체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아 지난 2월 미국과 일본 등 12개 국가가 TPP 협정문에 공식 서명했을 때 우리 정부가 초기에 승선하지 못한 데 대해 비판 여론이 제기됐다. 미국과 캐나다·호주·베트남 등 우리와 FTA를 맺은 시장에서 경쟁국인 일본이 우월한 조건으로 교역이 가능해질 우려에서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도 2월 TPP 서명식 이후 가입을 위한 잰걸음을 보였다. 오는 9월 열리는 정기국회에 TPP 협상 계획을 제출한다는 복안도 마련한 상태였다. 통상절차법에 따라 FTA 협상을 하려면 국회에 보고하기 전에는 공청회 등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회에 계획을 제출하기 한두 달 전인 7~8월께 TPP 가입을 둔 공청회가 열리며 ‘통상 판도라 상자’가 열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일본이 쌀에 이어 사과와 배, 감귤 등 파격적인 농업개방을 택했기 때문에 우리도 TPP에 가입하려면 농업 추가 개방이 불가피하고 이는 농업계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커서다.
하지만 최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신고립주의는 이 같은 통상당국의 걱정을 씻어내고 있다. 4월까지만 해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 대선이 끝나는 12월 TPP를 비준해달라며 의회를 강력하게 압박했지만 최근 대선 경선 과정에서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집권하면 TPP에서 탈퇴하겠다”며 강경론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민주당의 대선 정강정책 초안에서도 TPP에 대한 입장이 후퇴함에 따라 TPP 비준이 언제 가능할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또 최근 영국 국민투표 결과가 유럽연합(EU) 탈퇴로 나오면서 미국과 유럽 간 메가 FTA인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도 회의적으로 변했다. 정부 관계자는 “최근 퍼지는 신고립주의로 태평양 지역 경제는 TPP, 대서양은 TTIP로 블록화하는 동시에 전 세계 서비스 산업을 개방하는 복수국간서비스협정(TISA)을 맺는 미국의 ‘3T’ 전략이 느슨해지고 있다”면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이후 미 정부의 통상정책 방향이 어떻게 바뀔지 예의주시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이어 “TPP 가입을 본격화하는 시기가 미 대선이 끝난 내년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 역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TPP 가입에 적극적일 필요가 없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이미 TPP 12개국 가운데 일본과 멕시코를 제외한 10개국과 FTA를 맺어 낮은 관세장벽으로 무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민간연구원 박사는 “TPP만 제외하면 우리 FTA망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지금은 TPP 가입을 위해 섣부르게 움직이기보다는 향후 12개국과 해야 하는 가입협상 전략을 세밀하게 가다듬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구경우기자 bluesquar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