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바닥 중의 바닥 주가



41.22포인트. 1932년7월8일 미국 다우존스공업평균지수(DJIA)의 종가다. 전일 대비 0.59 포인트 하락한 이날 주가는 사실상의 최저치로 꼽힌다. 왜 ‘사실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가. 이보다 더 낮게 형성된 날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저기록은 28.48포인트(1896년8월7일). 절대 수치로는 가장 낮지만 19세기 기록인데다 다우존스 지수 편입 종목이 18개 안짝이던 시절이어서 의미가 크지 않다.

신문기자 출신인 찰스 다우와 투자분석가인 에드워드 존스가 개발한 다우존스지수의 출발점은 1896년(5월26일).* 파도의 움직임을 보고 개발했다는 다우존스 지수는 첫날 종가는 40.94포인트를 찍었다. 19세기가 저무는 1899년 말의 기록은 65.73포인트. 1910년초 98.34포인트, 1920년초 108.76포인트를 기록하던 다우존스 지수가 상승의 나래를 활짝 핀 시기는 1921년 여름부터. ‘번영과 재즈의 20년대’답게 주가가 뛰어올랐다.


1921년8월24일 63.9포인트에 머물던 주가는 1929년9월3일까지 내리 상승하며 381.17포인트까지 치솟았다. 제임스 딘이 주연한 1958년 개봉작 ‘이유 없는 반항’에서 나탈리 우드가 분장한 여주인공 주디의 부모들이 주식에 투자하고는 행복한 미래를 꿈꿨던 바로 그 시절이다. 익히 아는 대로 끝을 모를 것 같았던 호황과 주가 상승은 여기서 끝났다. 같은 해 10월 말 월가의 주가 대폭락으로 세계는 공황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반짝 회복기도 있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주가 대폭락 이후 5개월 동안 4차례나 단행한 금리 인하로 재할인율이 연 6%에서 3.5%로 떨어진 덕분일까. 다우존스지수는 1930년 300포인트대에 다시 올라섰다. 시장에는 짧고도 혹독한 조정이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한 목사들에게 ‘미국은 다시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수고대하던 강세장은 오지 않았다.

다우존스는 속절 없이 떨어졌다. ‘사실상의 최저치’를 기록한 1932년7월8일의 장중 최저가는 40.56포인트. 2년 10개월 전의 최고점에 비하면 90%가 떨어졌다는 얘기다. 트루먼의 뒤를 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통한 경기 회복 노력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에도 주가는 굼벵이 걸음. 다우존스 지수는 1954년 11월에 가서야 대공황 이전 수준을 가까스로 회복했다. 주가 대폭락으로부터 회복까지는 무려 4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위기의 순간에도 발 빠른 투자자들은 돈을 건졌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는 주가 대폭락을 예상하고 대주(貸株:주식을 빌려 주식으로 갚은 것으로 주가가 하락할수록 이익)로 큰 돈을 벌었다. 반대 경우도 있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1932년까지 손실에 손실을 거듭하며 집을 팔고 거리에 앉을 처지에서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났다. 당시의 경험을 그는 가치 투자, 종목 분석과 가치투자로 연결시켜 훗날 대성공을 거뒀다. 주식투자의 교과서로 꼽히는 ‘현명한 투자자’의 저자이며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레이엄이 바로 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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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투자자들이 침체장에 피눈물을 쏟았지만 시간을 보다 길게 잡으면 얘기가 다소 달라진다. 다우지수는 1972년 처음으로 네자릿수(1,000포인트)에 진입하고 1995년과 1999년에는 각각 5,000포인트와 1만포인트를 넘어섰다. 역대 최고치는 2015년5월19일의 1만8,312.39포인트. 장중 최고치는 같은 해 6월30일 기록한 1만8,351.36 포인트다. 20세기를 통틀어 다우존스지수의 연평균 상승률은 5.3%. 투자자 워런 버핏은 ‘어떤 상품이든 이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지 못했다’며 ‘(주식투자자에게) 20세기는 ’경탄할 만한 100년‘이라고 칭송했다.

앞으로의 주가가 어떻게 형성될까. 20세기의 상승과 비슷하다면 2099년 말 지수가 무려 200만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추론도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주식 장세가 그렇게 흐르기에는 현재 상황이 부담스럽다. 새천년을 맞을 당시 1만1,357.50포인트였던 지수는 한때 1만 포인트 아래로 떨어지며 투자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한국 투자자들의 사정은 더 딱하다. 코스피 지수가 지난 2007년 11월 도달했던 2,000포인트에 아직도 목을 매는 상황이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다우와 존스가 처음으로 지수를 개발한 시기는 1884년. 다우가 1882년 창간한 석간 신문사에 지수를 실었으나 주목받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났고 말았다. 신문사의 영향력이 약했던 데다 시장을 장악한 소수의 투기꾼들이 정보와 매매기법 독점 욕심에 철저하게 외면한 탓이다. 다우존스 지수가 개발 12년 만에 빚을 보게 된 힘도 역시 신문사에서 나왔다. 다우가 1889년 창간한 한 신문이 정기적으로 게재한 1896년 10월부터 다우존스 지수는 투자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다우존스지수와 함께 덩달아 성장한 이 신문이 바로 월 스트리트 저널이다.

** 조지프 케네디는 미국의 초대 증권거래위원장이자 대통령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월가의 불법 시세조종을 감시할 증권거래위원장 자리에 그를 임명한다는 사실에 여론이 들끓을 정도였다. 지독한 투기꾼이었기 때문이다. 금주법 아래 밀주 매매로 돈을 번 적도 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라는 여론에도 결국 임명된 그는 임무를 잘 소화해냈다. 루스벨트가 그의 임명을 강행한 이유는 보상 차원. 막대한 선거자금을 댄 덕분에 초대 증권거래위원장에 오른 그는 불법을 근절하고 시중 자금흐름의 정상화도 이끌었다. 1935년 위원장직을 사임한 그는 대통령 특사로 일하다 1938년 영국 대사직을 맡았다. 둘째 아들 존이 런던에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하바드 대 졸업 논문 ‘영국은 왜 잠을 잤나’는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대통령직까지 가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둘째 아들이 대통령이 됐지만 당초 조지프 케네디는 첫째인 조지프 케네디 2세를 대통령감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남은 2차 대전시 육군 항공대 조종사로 참전해 독일 상공에서 격추돼 실종 처리됐다. 둘째는 현직 대통령으로 저격 당해 숨지고 셋째 로버트도 법무장관을 역임한 뒤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직후 암살 당했다. 상원의원을 지내는 내내 잠룡으로 손꼽혔던 막내 에드워드만 출마하지 않은 덕분인지 천수를 누렸다. 조지프 케네디가 행한 불법과 성취의 크기만큼 그 후손들도 성공과 불행을 맛본 셈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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