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4조원이 넘는 분담금을 내기로 하고 확보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직을 사실상 상실했다. 어렵게 확보한 부총재직을 산업은행을 둘러싼 잡음으로 눈 뜬 채 잃게 된 것으로, 국제적 망신을 당하게 됐다. 한국과 미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발표한 날 이 같은 결정이 내려져 중국이 사드 배치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AIIB는 8일 홈페이지를 통해 공고를 내고 재무담당 부총재직(Vice President - Finance)을 신설하고 후보자 공개 채용에 나선다고 밝혔다. 앞서 AIIB는 국장급이던 최고재무책임자(CFO)에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를 역임한 프랑스의 티에리 드 롱구에마(Thierry de Longuemar)를 선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번 공개 채용은 사실상 요식절차가 되고 신임 부총재는 프랑스가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AIIB는 현재 휴직 중인 홍기택 부총재가 맡아온 최고리스크책임자(CRO) 직위는 국장급(Director General)으로 격하시켰다.
공교롭게도 이 같은 결정은 한반도에 사드 배치가 공식 발표된 날 나왔다. 사드에 대한 중국의 불만 표시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당초 중국은 다음주 께 신임 부총재 공모 공고를 낼 예정이었지만 사드 배치가 8일 이뤄지면서 공모 시점을 앞당겼다는 분석이다. 또 우리나라가 3억달러(약 4조 3,400억원, 5년분납)을 내고 보장받은 부총재직이라 정치·경제적으로 상당한 파장도 예상된다. 물론 부총재 자리를 잃는다고 해서 우리의 AIIB 출자금에 당장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추후 AIIB의 사업을 수주하는 데 있어서 타격이 우려된다. 홍 부총재에 대한 책임론도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AIIB내 지분율은 3.81%로 전체 회원국 중 5번째로 많다. 중국이 30.34%로 가장 많고 인도(8.52%), 러시아(6.66%), 독일(4.57%), 한국(3.81%), 호주(3.76%), 프랑스(3.44%) 인도네시아(3.42%), 브라질(3.24%), 영국(3.11%) 순이다. 현재 부총재는 한국, 영국, 독일, 인도, 인도네시아가 차지하고 있으나 한국이 빠지고 프랑스가 들어갈 것이 확실시된다.
당초 지분율이 3번째로 많은 러시아가 부총재 자리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중국 측이 이를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는 지역 내 경쟁자였던 영국과 독일이 부총재로 선임됐지만 본국은 빠져 부총재직 자리를 애타게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 국제금융 라인은 ADB에 이어 또 다시 부총재 직에서 물을 먹는 수모를 겪게 됐다. 앞서 지난해 12월 우리는 ADB 부총재 자리를 노렸으나 호주에게 내줬다. 지분율만 놓고 보면(6위) 당연히 얻을 수 있는 자리(부총재 6명)임에도 12년 연속 놓쳤다.
/세종=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