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대동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그윽했음이 틀림없다. 그림이 그렇게 말한다. 한국 현대소설의 걸작으로 꼽히는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75)의 첫 개인전 ‘김승옥 무진기행 그림전’이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21일까지 열린다.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는 정겹고 ‘다산초당’은 격조있으며, 진도의 ‘운림산방’과 ‘남도석성’은 애틋하다. 간략하지만 명쾌하고 진정성 있는 필치는 그림이지만 작가의 글과 닮았고, 맑고 산뜻한 색채는 그의 인품을 닮은 듯하다.
출품작 63점은 작가가 여수·통영·제주도 등 남쪽 지방을 여행하며 그린 수채화가 대부분이다. 박목월과 윤동주 묘소, 이육사와 서정주 생가, 김춘수와 정지용 동상, 유치환 시비 등 문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들이 주를 이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도 있다. 김승옥과 가까웠던 작가, 평론가 등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도 10점이나 걸렸다. 1960년대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중심이 된 동인지 ‘산문시대’의 김현·최하림·강호무 등과 소설가 황순원, 최인호의 얼굴이 담겼다.
이번 전시는 김승옥의 서울대 후배인 김영곤 21세기북스 출판사 대표가 주선해 성사됐다. 김승옥은 1952년 월간 ’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한 것을 계기로 문학청년이 됐지만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다. 서울대 불문과 1학년이던 1960년 국내 첫 경제일간지로 창간된 ‘서울경제신문’에서 김이구(金二究)라는 예명의 시사 만화가로 활동하며 촌철살인의 ‘파고다 영감’을 연재했다. 이후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생명연습’으로 등단했다. 1965년 대표작인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을 연달아 발표했다. 1980년에 장편소설 ‘먼지의 방’을 신문에 연재하던 중 광주민주화 운동과 그에 대한 군부대 진압 사실을 알고 연재를 자진 중단한 동시에 절필을 선언했다. 2003년 중풍으로 쓰러졌다. 현재는 순천문학관 ‘김승옥관’에 마련된 집필실에서 힘겹게 작업하고 있다.
한편 지난 8일 개막식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피아니스트 백건우·배우 윤정희 부부, 배창호 영화감독 등이 참석했다. 이어령 전 장관은 “1977년 이상문학상을 제정하고 이상을 닮은 가장 창의적인 사람을 찾으니 김승옥밖에 없었다”며 “제1회 상을 주려고 김승옥에게 소설을 쓰게 했는데 앞부분밖에 못 쓰고 완성을 못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제목에 ‘0장’이라고 붙여서 ‘서울의 달빛 0장’이 됐고 그걸로 상을 줬다”는 얘기로 추억을 들춰냈다. 김승옥이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일을 안타까워한 이 전 장관은 “그래도 신이 김승옥에게서 글 쓰는 재주를 뺏고 언어까지 뺏었지만 이렇게 그림을 그리게 됐다”면서 “김승옥의 아름다운 언어가 색채와 점과 선으로 표현된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무진을 방문할 수 있다”고 축하했다. (02)747-6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