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이 자율협약이라는 빈약한 동아줄로 채권단을 끌고 가는 기존의 기업 구조조정 방식이 한계에 부딪힌 가운데 법정관리와 자율협약의 장점을 결합한 ‘팬오션 식’ 구조조정 방안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채권단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다.
구조조정 기업들이 해마다 늘고 그에 따른 금융권의 리스크도 커지는 상황에서 자율협약과 같은 엉성한 모델로는 기업회생도 담보하지 못하면서 채권단의 건전성만 해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 도입된 자율협약은 최근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자율협약은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채권단과 사적인 협약을 맺고 채권단 감독 아래 재무구조 개선 등 경영정상화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과 거의 비슷하지만 협약에 의존하기 때문에 법적 근거가 없고 강제성이 약하다.
채권단이 자율협약 상태에서 4조5,000억원을 지원하고도 38개월 만에 법정관리로 전환한 STX조선해양은 자율협약이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STX조선뿐 아니라 지난 2014년 7월 자율협약에 들어간 동부제철도 결국 워크아웃으로 전환했고 동국제강 자회사인 디케이아즈텍도 워크아웃을 거쳐 결국 법정관리를 선언했다.
현재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은 기업들의 구조조정 성적표도 낙제점에 가깝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등 조건부 자율협약 상태인 곳을 제외하면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은 곳이 14개사로 자율협약 이후 채권단이 이들 기업에 쏟은 지원만도 10조300억원에 달한다. 14개사는 STX조선·중공업·엔진, ㈜STX, 동부제철, 대한전선, 성동조선해양, 한진중공업 등이다. 이들 중 그나마 자율협약을 통해 회생징후가 보이는 곳은 IMM프라이빗에퀴티(PE)에 매각된 대한전선 한 곳뿐이다.
자율협약이 구조조정 대신 좀비기업의 수명 연장 수단으로만 기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자율협약과 법정관리의 장점이 결합한 새로운 구조조정 모델인 ‘크레디터스 트랙(creditor‘s track)’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자율협약이 본질적인 경쟁력 강화보다는 채권단의 고혈을 통해 당장의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는 데만 급급하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산업은행이 고려하고 있는 새로운 구조조정 모델은 법정관리를 통한 일괄적인 채무 재조정으로 기업의 부채를 탕감하고 이후 채권단이 운영자금 등 신규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자율협약은 통상 신규 자금은 지원할 수 있지만 대규모 채무 재조정이 쉽지 않고 법정관리는 반대로 모든 채권의 공정한 재조정이 가능하지만 충당금 부담으로 자금 지원이 어렵다. 자율협약으로는 채권단 등 협약 채권에 대한 채무 재조정만 가능하지만 법정관리는 비협약 채권자의 빚까지 탕감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또 저가 수주와 장기 용선료 계약과 같이 정상화에 걸림돌이 되는 계약 관계도 법정관리를 통해 끊어낼 수 있다.
크레디터스 트랙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2013년 6월에 법정관리에 들어간 팬오션이다. 팬오션은 법정관리 개시 이후 본격적인 회생 절차가 시작되는 시점인 두 달 후 채권단으로부터 신규 자금을 수혈 받았다. 빚 탕감 이후 운영자금을 투입해 정상화 속도를 높이자 법정관리 개시 1년 6개월 뒤인 2014년 12월 하림이 팬오션 인수 의사를 타진했고 결국 2015년 6월 인수가 확정됐다. 팬오션은 2015년 7월 법정관리를 졸업하면서 산은도 신규 자금으로 투입한 2,000억원을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새로운 구조조정 모델로 기업 조기 정상화는 물론 주채권은행의 건전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다만 크레디터스 트랙을 실제 구조조정 모델로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금융당국은 물론 법원의 협조가 필요하다. 법정관리는 법원 파산부 주도로 이뤄지기 때문에 크레디터스 트랙하에서는 법원과 채권단의 공조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채권단의 한 고위관계자는 “채권단 주도의 자율협약과 워크아웃, 법원 통제하의 법정관리를 통합하는 제4의 제도를 만들어 구조조정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면서 “중장기적으로 법원·금융당국과 논의해서 제도를 법제화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도 “조선업 구조조정 등 선수금환급보증(RG) 등이 첨예하지 않은 일반 구조조정에는 이 모델을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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