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지난달 홍기택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가 돌연 휴직계를 제출한 직후 AIIB 고위관계자와 회의를 갖고 부총재직을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숨긴 채 최근까지도 부총재직을 되찾겠다고 입장을 되풀이해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3일 서울경제신문이 단독 입수한 ‘AIIB 행정부총재(CAO) 컨퍼런스콜 결과 보고’라는 문서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홍 AIIB 부총재가 휴직계를 낸 직후 루키 에코 우랸토 AIIB 행정부총재(Vice President and Chief Administration Officer)와 컨퍼런스콜(다자간 전화회의)을 갖고 부총재직과 국장급 인사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우랸토 부총재는 홍 부총재의 자리(CRO)를 국장급(DG Level)으로 격하시키는 대신 재무국장(CFO) 자리를 부총재로 격상시킨다는 사실을 우리 정부에 통보했다. 이와 함께 오는 10월께 티에리 드 롱게마르 CFO를 부총재로 임명하는 사안도 우리 정부와 사전 협의했다. 정부가 홍 부총재의 휴직 사태 직후 우리나라 몫의 부총재직을 이미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얘기다.
AIIB는 7월 초 국장급 자리를 공고한다고 언급하면서 채용은 철저히 능력 위주로 뽑겠다는 말도 우리 정부에 전했다. 우리 정부는 회의에서 “재무국장은 한국을 1순위로 해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우랸토 부총재는 “국장급은 능력 위주(Merit-based)로 뽑겠다”며 사실상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지금까지도 공개하지 않은 채 부총재직을 되찾을 수도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8일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외경제장관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만약 (부총재직) 후임 선임 절차가 공식화되면 한국 사람이 될 수 있게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고 말했다. AIIB는 컨퍼런스콜에서 밝힌 것처럼 이날 오후7시께 재무담당 부총재(Vice President-Finance)와 재무국장(Treasurer), 회계국장(Controller)과 부총재 자리에서 국장급으로 격하된 위험관리국장(Director General Risk Management) 채용공고를 냈다. 기재부는 같은 날 저녁 늦게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재무담당 부총재를 포함한 AIIB 중요 고위직에 한국인이 선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알렸다.
유 경제부총리는 또 최근 국회에서 “AIIB 부총재직은 대한민국의 손을 떠난 것이냐”는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솔직히 아직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고 좀 노력할 것은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면피성 발언을 하며 안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국장급 자리조차 개인이 지원해야 하는 일로 치부하고 있다. 4조원이 넘는 돈을 분담한 데 이어 기재부 내에 AIIB팀까지 따로 있지만 차후 국장급 자리를 얻지 못할 상황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장도환 지역금융과장은 “AIIB와 회의한 사실이 없다”면서 “국장급을 비롯해 모든 자리는 개인이 지원할 일이며 정부에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해명했다. /세종=구경우기자 bluesquar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