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조미료, 노년에 감치다

[식담객 신씨의 밥상] 열일곱번째 이야기-조미료



“거 하나만 물어봅시다. 거기서 만드는 조미료가 건강에 해롭지 않습니까?”

고단한 노년 남성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전해집니다.


갑자기 마음의 평온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서툰 긴장감이 채웁니다.

이 상황을 헤쳐갈 수 있게 도와줄 구원자를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2003년 여름 어느 토요일 아침, 식품기업으로 이직한 지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을 무렵이었습니다.

여름휴가 중인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혼자 사무실을 지키다가, 우연히 당겨받은 전화였습니다.

조미료, 그 중에서도 미원으로 대표되는 인공 조미료 MSG는 회사의 대표 제품입니다.

입사 첫날부터 자료들을 많이 읽어 정보는 있었지만, 막상 직접 설명하려니 초조합니다.

“선생님, MSG는 안전한 식품첨가물입니다. 안심하고 드셔도 좋습니다.”

밝고 상냥하게 대답하려 애씁니다.

“그게 건강에 안 좋다고 하는데, 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럼요. 의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나를 나무라는 듯합니다.

“그 말 믿을 수 있어요? 우리 자식들이 안 좋다고 먹지 말라는데...”

몇 차례 되돌이표를 찍는 문답에, 이야기가 투박해지기 시작합니다.

전화를 거는 이가 말로만 듣던 블랙컨슈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애사심에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직을 하며 많은 변화들을 겪는 중이었습니다.

한참 설명해도 모르는 작은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이름만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큰회사 소속이 되니 대우가 달라졌습니다.

친구도, 지인도, 예전보다 나를 더 존중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고마움도 남달랐습니다.

자칫하면 어렵사리 손에 쥔 행운을 놓칠 것만 같았습니다.

시나브로 방어모드에 돌입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받아 적고, 그에 맞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 MSG에 대해 1995년에 세계보건기구와 미국 식약청에서 공동 조사한 결과, 유해성이 없다고 판명되었습니다. 더불어 1일 섭취 제한량도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차분하게 한 단어 한 단어 정성을 쏟아 설명합니다.

다음 공격에 대응하려면 흥분은 금물입니다.

“아, 그럼 정말 다행이네요. 선생님이 그걸 우리 자식들한테도 좀 알려주실 수 있겠소?”

노인께서 기뻐하십니다.

뭔가 단단히 각오했다가, 맥이 빠진 듯 어리둥절합니다.

뭐가 뭔지 당최 감을 잡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어떤 상황이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참... 허허...”

노인께서 말을 이으십니다.

“내가 몸이 좀 아파요. 그래서 우리 자식들이 아주 난리에요. 술담배 못 하게 하는 건 이해하는데, 음식까지 밍밍한 걸 먹으라지 뭡니까?”

“아이고, 자제분들께서 효성이 지극하시네요.”

“난 좀 맛있게 먹고 싶은데, 미원 안 좋다고 못 먹게 하니까 아주 속상해요. 그러니 우리 선생님이 자식들한테 얘기 좀 해줘요. 먹어도 된다고.”

살짝 난감했지만, 훈훈한 한 병실풍경이 그려집니다.

살짝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를 마칠 준비를 합니다.

“MSG는 인체에 유해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빨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참 깔끔하고 훈훈한 갈무리라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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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허허...”

노인의 담담하고 아쉬운 듯한 말맺음에, 갑작스레 궁금증이 밀려옵니다.

“선생님,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머리에 반갑지 않은 게 찾아왔어요. 종양이 생겼다네요.”

머리가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은 날들이라도 좀 맛있게 먹다 가고 싶은데, 몸에 안 좋다고 먹지 말라고만 하니...”

“아... 네...”

“참 신기했어요. 없이 살던 시절, 뭐 변변한 찬거리가 있나? 그런데 미원만 넣으면 음식이 맛있어지더라구요. 고생 고생하던 젊은 시절부터 밥 먹을 때면 항상 생각나요.”

“그러셨군요.”

“도와 달랄 곳이 없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회사로 전화했어요. 아침부터 힘들게 해 미안합니다.”

착잡한 마음과 뭐라도 얘기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뒤섞입니다.

“선생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어떤 말을 할지 머릿속을 정리해 갑니다.

“아직 신입사원이라 아주 잘 알지 못합니다. MSG가 안전한 건 확실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몸이 많이 편찮으시니까, 자제분들 말씀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밖에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노인이 담담히 대답하십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옛날 그 맛이 너무 그리워요. 한 끼라도 좀 맛있게 먹으면 좋겠어. 자식들에겐 내가 얘기하리다. 마음 써줘서 고맙소. 잘 지내요.”

전화를 끊고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혹시라도 노인께서 조미료를 듬뿍 넣은 음식을 드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지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전화번호를 적어두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잠시 후엔 업무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감이 찾아왔습니다.

홍보는 내 천직이자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던 만큼 충격도 컸습니다.

홍보라는 업무가, 자칫하면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있다고 해도, 이 매력적인 업무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고작 2년차 풋내기였지만, 홍보가 창의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멋진 직업이란 걸 알기엔 충분했습니다.

끌리는 맛이 있었습니다, 감칠맛에 끌리는 조미료처럼.



조미료의 대표적인 맛으로 ‘감칠맛’을 이야기합니다.

단맛, 쓴맛, 신맛, 짠맛과 함께 5미(味)로 꼽히는 감칠맛은 어떤 뜻일까요?

조미료 자체의 맛은 늑늑하고 짭짤해 그리 당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재료와 만나면 본연의 맛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내줍니다.

감칠맛은 여기서 나옵니다.

‘감치다’라는 말은 본디 바느질을 할 때 마무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옷감의 가장자리를 감아서 꿰매는 방법을 말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혀에 감겨 계속 찾게 되는 맛’이란 의미로 쓰입니다.

영어로 단순히 맛 좋은, 향긋한 이란 뜻(savory)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13년이 지난 지금, 힘 있는 인물과 조직의 비호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홍보인들의 모습에 입맛이 씁쓸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기발한 아이디어와 서 말 구슬을 꿰는 기획력으로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는 홍보가 참 가치있는 일이란 생각도 듭니다.

내게 홍보는 끊을 수 없는 평생의 업(業) 같습니다.

노인께서 마지막까지 그리워했던 미원처럼 말입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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