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잘 알려진 김승옥 작가는 시사만화가로서 먼저 그의 이름을 알렸다. 서울경제신문이 창간되던 1960년. 김 작가는 당시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1학년생이었다. 만 19세이던 그는 성북동에 있는 어느 집에서 중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집이 가정교사를 두고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집이 아니어서 미안한 마음에 다른 일을 알아보게 됐다.
그 무렵 서울경제신문 창간 소식을 접한 김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의 그림 솜씨를 동원해 연재만화 샘플 몇 장과 함께 “아직 연재만화가 결정되지 않았으면 본인에게 그리도록 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의 문구를 함께 적어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앞으로 보냈다. 뜻밖에도 “계약할 테니 신문사로 와달라”는 회신이 왔다. 그렇게 만화가의 삶을 시작했다. 만화 작가로서 본명 대신 ‘김이구’라는 필명을 썼다. 순천 고향집 번지수(매곡동 29)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이후 김 작가는 서울경제신문에 네 컷 만화 ‘파고다 영감’을 총 134회에 걸쳐 연재하며 4·19 직후부터 5·16 직전까지 혼란했던 우리 사회를 풍자했다. 한 지게꾼이 장관 사무실에 와서 도시락 배달국을 설치하자고 제안하는 첫 회 만화를 통해서는 이승만 정권과 단절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던 장면 정권을 ‘도시락 정권’으로 빗대 비판했다. 또 전국노래자랑에 변호사가 출연해 “원흉을 따르자니 데모가 울고 데모를 따르자니 원흉이 운다”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만화에서는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당시 사법부를 희화화했다.
이 밖에 쌀값이 내렸다는 소식에 내린 돈만큼 과일을 산 임산부가 오후에 쌀가게에 갔더니 다시 쌀값이 올라 저녁을 굶게 된다는 내용을 만화로 그려 하루가 다르게 요동쳤던 물가를 개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