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응답하라...8.8대책



‘88(팔팔)’. 이미지가 많다. 우선 1988년 개최된 서울올림픽이 떠오른다. 최초의 국산전차 K-1도 처음에는 ‘88전차’로 불렸다.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구구 팔팔’이라는 건배 구호가 유행한 적도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의미다. ‘88’은 한국 경제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등장한 부동산종합대책이 바로 ‘8·8 부동산 종합대책’이다. 1979년8월8일 발표돼 이런 이름이 붙었다.

물론 8·8 대책이 첫 부동산 정책은 아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강남 개발을 앞두고 땅값이 크게 오른 1967년 부동산투기억제 특별조치법이 제정된 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부동산을 경제운용의 핵심 변수로 인식하고 관련 법규와 규칙을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손본 것은 ‘8·8대책’이 효시다. 당시 정부가 발표한 특별조치의 정식 명칭은 ‘부동산 투기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 정부가 이 카드를 꺼낸 이유는 과열 때문이었다.


당시 경제정책 라인은 남덕우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용환 재무부 장관, 김정렴 청와대 경제수석.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유신 경제팀’인 이들은 1976년 말부터 새로운 현상에 골머리를 앓았다. 겉으로 보기에 경제는 잘 나갔다.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 국민 1인당 소득 1,000달러를 돌파하는 감격을 누렸다.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오일 달러도 쏟아져 들어왔다.

문제는 외화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점. 해외부문에서의 통화 증발에 수출 금융과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정부의 자금 지원이 더해져 돈이 넘쳤다. 반면 물자는 여전히 부족했다. 돈은 많고 물자는 적은 수급 불균형은 물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물가가 뛰면 시중 자금은 금융권을 이탈해 부동산 같은 실물로 흐르기 마련. 시중 부동자금은 모두 부동산 시장에 몰렸다. ‘복부인’이란 유행어도 이때 처음 나왔다.

서울의 자가 주택보유율이 45% 이던 시절, 부동산 중에서도 아파트 가격이 치솟았다. 1976년까지 평당 40만원이던 아파트 분양가격이 1년 사이 60만원으로 뛰었다. 비싸진 분양가에도 아파트를 당첨만 받으면 바로 프리미엄이 붙었다. 프리미엄까지 주고 산 아파트 가격도 급등 일변도였다. 땅값도 덩달아 뛰었다. 1976년 26%였던 전국의 평균지가 변동률이 1977년 34%, 1978년에는 49%까지 올랐다. 특히 서울 지역 땅값은 1978년 135.7% 폭등했다.

경제 부처 내부에서는 ‘이대론 안된다’라는 인식이 퍼졌다. 강만수 디지털경제연구소장(당시 직함)이 2005년 발간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는 이런 대목(77쪽)이 나온다. ‘부동산 투기는 만병의 근원이었다. 부녀자도 은행 돈을 빌려 땅을 사면 1년에 30% 이상, 운만 좋으면 몇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은행자금의 만성적 초과수요와 고금리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전 국민이 투기에 나섬으로써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의 의욕을 꺾고 주택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인플레 유발의 가장 큰 원인도 되었다. 기업도 비싼 토지가격 때문에 대외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부동산 투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12월로 예정된 11대 총선을 앞두고 민심을 달랠 조치가 필요한 시기였다. 마침 아파트 특혜분양*과 여당 국회의원의 여고생 성추행 사건**, 경북교육위원회의 교사증 허위발급*** 등 3대 스캔들로 부정부패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져 있던 터. 정부는 최초의 종합부동산 대책에 가능한 한 많은 내용을 넣으려고 애썼다. 토지거래 허가·신고제 도입을 비롯해 기준지가 고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도 시행, 비업무용 토지에 대한 공한지세 부과 등이 포함되고 양도세 과세 강화 방안도 담겼다. 공인중개사제도 도입과 토지개발공사 설립도 이때 방향이 정해졌다.

‘8·8 대책’은 약발이 있었을까. 초기에는 그랬다. 특히 미등기 전매에 대한 양도세 100% 부과 방안이 시장에서 먹혔다. 무리해서 아파트를 계약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계약을 떼인 경우도 적지 않아 폭등세가 바로 꺾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책을 비웃듯 아파트 가격은 다시 뛰었다. 토지의 경우에도 대책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 지가 상승률은 둔화했으나 재벌 그룹의 토지 소유는 오히려 늘어났다. 곳곳에 구멍을 만들었던 탓이다. 법인 대표의 개인 소유와 계열 그룹사가 보유한 부동산이 정부의 관리 및 감시 대상에서 빠졌다. 결국 피라미만 걸렸다.


최초의 종합대책에서 왜 구멍이 생겼을까. 정부 내부의 반발이 많았던 탓이다. 재무부는 토지거래의 전면 허가제를 시행할 계획이었으나 건설부의 반대로 신고제로 바뀌었다. 토지매매계약 체결을 변호사가 맡는 방안는 내무부가 제동을 걸어 공인중개사제도 도입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제부처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양도세도 갈수록 완화돼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졌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공무원은 ‘투기꾼들과의 전쟁보다 내부 반대자들과의 전쟁이 더 힘들었다. 밤낮없는 수고가 허탈할 뿐이었다.… 만병의 근원인 부동산 투기는 정부 정책을 비집고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그럴 때 마다 8·8 부동산종합대책의 내용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라고 회고했다.(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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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전 장관의 지적대로 부동산 투기는 정부 정책을 비웃으며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부동산 관련 대형 정부 정책이 방향도 원칙도 없는 순간 순간의 대증(對症)요법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공무원들이 신조와 정책을 뒤바꾼 사례도 많다. 8·8대책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해 주기적으로 투기가 반복되는 점을 안타깝게 여겼던 강만수씨는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된 후에는 줄곧 양도소득세를 풀어주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장관의 부양 일변도의 부동산 정책에 나름대로 속도 조절하려던 최경환 당시 한나라당 수석정조위원장도 비슷한 행로를 보였다. 경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실세 부총리로 기대를 모았으나 ‘빚내어 집 사라’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오락가락 냉온탕식 정책이 계속되며 부동산 시장은 심각한 투기 후유증을 앓고 있다.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인 거대한 가계부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종합부동산정책이 나온 지 38주년, 언제까지 정부의 실패와 시장의 탐욕의 맞물린 널뛰기에 경제가 흔들려야 하는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부정분양 사건. 1974년부터 본격화한 강남지역의 아파트 건설과 가격 상승 속에 1977년 9월 착공된 한국도시개발의 압구정동 5차 분양분(728가구)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평수가 넓은 데다 한강 조망권도 뛰어났다. 평당 분양가격이 30만원이었으나 분양 1년 만에 세 배로 뛰었다. 문제는 특혜 분양. 당초에는 절반은 사원용, 절반은 일반 분양용으로 승인을 받았으나 사원용을 일반인, 그 것도 특수층에만 특혜 분양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사정당국은 6월30일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을 받은 사회지도층 인사 600여명을 밝혀내고 해당 부서에 통고했다. 7월4일에는 259명의 명단이 공개됐다.(공직자 190명, 언론인 34명, 법조인 7명, 국회의원 6명, 예비역 장성 6명). 처벌은 하위직 공무원들만 받았다. 특혜 분양이 두 번째로 많았던 그룹인 기자 출신 가운데는 한나라당 대표와 서울시장을 지내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도전한 인사도 있었다.

** 공화당 성낙현 의원과 여고생들의 섹스 스캔들. 헌정사상 충격이 가장 컸던 스캔들로 손꼽힌다. 당초 야당인 신민당 소속 의원이었으나 1969년 3선 개헌에서 개헌을 지지해 출당되고 의원직을 상실(신민당은 3선 개헌 당시 3인 ‘배신자’들의 국회의원 배지를 떼기 위해 소속 의원 44명을 제명한 뒤 당을 해산하는 극약 처방을 택했었다)한 뒤 다음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된 성 의원의 스캔들이 불거진 단초는 서울 시내 모 여고의 소지품 검사였다. 여학생들이 평소와 달리 조퇴와 무단결석을 자주 하자 불시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는데 가발과 피임약, 콘돔, 거액의 현금과 10만원권 수표 등이 나왔다. 10만원은 당시 국립대학교 등록금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추궁 끝에 전모가 드러났다. 학도호국단 여의도 행사에 동원된 여고생들이 승용차에 태워줬던 인연(당시 여의도에서 마포로 나오는 차편이 마땅치 않아 행사에 동원된 고등학생들은 보통 마포대교를 걸어서 강북에 이르러 버스를 타야 했다)이 고고장을 걸쳐 성관계로 발전했다. 주로 성 의원의 일본인 친구 집에서 성관계가 이뤄졌다. 결국 성 의원은 구속됐으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였다. 성 의원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1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 경북교육위원회 직원들이 교육감 직인을 도용하여 1971년부터 77년 말까지 교사 자격증을 부정 발급한 사건. 버스 안에서 초등학교 교사 한 사람이 동료 교사에게 자격증을 내보이며 “이게 80만 원짜리다”라고 말하

는 데서 비롯되었다. 마침 뒷좌석에 앉아 있던 형사 하나가 이 말을 들었다. 연행, 구속과 재판으로 이어졌다. 교육위원회는 이를 쉬쉬했고 경찰도 단순 범행으로 종결 지었다. 재판도 30만원 벌금형에 그쳤다. 그러나 가짜 자격증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경북도교육위원회는 자체 조사를 실시, 윤곽을 파악하고도 문교부에는 보고하지 않았다. 78년 2월 예정된 교육감 선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은폐 시도에도 소문은 끊이지 않아 문교부가 조사에 나선 결과 1978년 8월초 전모가 밝혀졌다. 범인은 초등학교 교사와 중학교 강사로부터 1인당 70~100만 원씩 받고 중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준교사에게는 2급 정교사, 2급 정교사에게는 1급 정교사 자격증을 허위로 내줬다. 7년 동안 주모자는 3,000만원을, 공모자는 340만원을 챙겼다. 교육감 사임과 관계자 구속으로 사건은 종결됐으나 사회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었던 교단까지 가짜 선생님이 있었다는 점은 커다란 사회적 충격을 안겼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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