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기요금제가 종량제인 동시에 6단계의 누진제가 적용돼 사용량이 늘수록 요금은 큰 폭으로 증가해 1단계보다 6단계 사용 요금이 최대 11.7배나 비싸다. 올 기록적인 폭염으로 7~8월 에어컨 사용량이 많았던 가구는 수십만원에 달하는 전기요금 폭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누진 단계 축소 등 누진제 완화 찬성 측은 가정용 전기수요가 국가 전체 전력수급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현 누진제가 국민 삶의 질 제고에 맞지 않는 구조인 만큼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신중론을 펴는 측은 누진제가 요금할증과 함께 할인도 적용돼 에너지 절약과 공유자원 배분에 합리적인 제도인 점을 들어 이를 유지하면서 미진한 부분만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전기요금 누진제에 대한 논란이 격하다. 국민들이 재난 수준의 폭염이 불러올 전기요금 폭탄을 걱정하면서 범인으로 누진제를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누진제는 범인이 아니다. 누진제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제도인가 시시비비를 가리면 누진제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기요금제는 공유자원의 합리적 분배를 위한 제도다. 공유자원으로서 전기를 바라본다면 모든 국민은 전기 소비의 권리가 있다. 동시에 적절한 수준의 전기 소비는 꼭 필요하다. 낮은 가격으로 적절한 전기 소비를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것이 옳다. 이것이 현행 누진 4단계까지의 요금이다. 여기까지의 우리나라 요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많이 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전기 소비는 권리라 하기 어렵고 공동체 전체에 나쁜 영향을 주므로 가격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누진 5~6단계의 한계비용을 높게 정한 것이다. 이렇게 남긴 이익은 화석연료를 아끼고 온실가스와 미세먼지를 줄이는 기술개발에 투자한다. 태양광발전, 고효율 에너지 설비도 지원해 일자리를 늘린다. 이것이 누진요금제의 취지다.
우리나라의 전기요금 누진제는 할인·할증제다. 누진제는 평균적인 소비량을 기준 삼아 누진 3~4단계로 하고 이보다 덜 쓰면 할인, 더 쓰면 할증한다. 할인은 두 번 해서 2단계에서는 반값, 1단계에서는 4분의1 가격으로 깎아준다. 모든 소비자가 처음 200kwh에 대해서 이런 혜택을 누린다. 할증도 두 번 하는데 OECD 평균소비인 5단계에서는 OECD 평균요금 수준인 1.7배, 6단계에서는 약 3배로 할증된다. 그래서 우리의 누진제는 6단계다.
다른 나라의 누진제는 할증만 한다. 당연히 2~3단계에 2~3배 할증한다. 우리의 할인할증제가 외국의 누진제에 비해 더 합리적이다. 누진제 급간이 더 많다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할인구간이 있기 때문에 6단계인 것이다. 1단계보다 6단계 사용요금이 12배나 비싸진다고 비난하지만 따져보면 할인한 4분의1 요금을 기준으로 할증한 3배의 요금을 따지니 12배가 된 것이다. 할인이 없으면 외국과 비슷해진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처음 할인받은 혜택은 잊고 나중에 받은 할증에 화낸다. 이렇듯 누진제는 운명적으로 인기 없는 제도다. 그래도 누진제를 해야 하는 것은 우리 후대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진제 가치를 인정하면서 불합리한 점은 고쳐나가야 한다.
우선 주택용에만 할인할증 방식을 적용하는 게 옳은가의 문제다. 우리나라의 기업은 같은 제품을 생산할 때 전기를 OECD 평균의 2배를 더 쓴다. 기업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과거 누진제는 지속 가능성보다는 산업과 경제성장을 우선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삶의 질을 양보하면서까지 기업을 우선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기업의 이익을 누리는 것은 주주이지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 및 일반용 전기요금에도 할인할증제를 적용하되 그 기준은 사용량이 아니라 기업의 고용창출에 따른 할인과 온실가스 및 미세먼지 배출에 대한 할증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육용과 같이 공익적 가치가 있는 영역의 전기요금은 다른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
둘째, 전기요금 폭탄 문제다. 그런데 요금폭탄은 누진제가 아닌 폭염이 원인인 만큼 재난의 문제이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재난이라면 한시적 구난조치가 추가돼야 한다. 폭염·한파가 발생할 때 전기요금을 할인해줘야 한다. 최근 정부대책은 미진했다. 보다 더 많이 배려해줬어야 했다.
셋째, 소득 수준 증가에 따라 늘어난 필수 전기소비량을 반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누진 3~4단계를 하나로 묶고 그 폭을 500kwh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나머지 단계는 가격도 구간 폭도 지금처럼 유지하면 된다. 그러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현재보다 약 2배에 달하는 OECD 평균 수준의 소비에 OECD 평균 수준의 요금을 낼 것이고 요금폭탄도 사라진다.
넷째, 현재 가구 기준 누진제에는 1인 고소득 가구와 다인 저소득 가구 사이의 형평성 문제가 있다. 이는 사람(가구원) 기준의 누진제로 해결할 수 있다. 가령 1인 가구는 단계별 구간 폭을 50·100·150kwh로 올라가게 하고 4인 가구는 200·400·600kwh 등으로 올라가게 한다. 이것은 소비자가 자신의 가족 수를 등록하기만 하면 된다. 스마트 미터기로 간단하게 실행할 수도 있다.
누진제는 세계적인 모범으로 자랑할 만한 제도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쉽게 보완할 수 있다. 재난상황을 틈타 제도의 근본을 흔들고 응당한 상식을 버린다면 나라의 장래를 망치는 것이다. 전기요금 폭탄의 진짜 원인은 국민 모두 억울함이 없도록 주택용 누진제를 개선함과 동시에 가려진 산업용 전기요금의 민낯을 드러내야 해결될 것이다. 혁신적인 에너지 기술을 가진 기업이 값싼 산업용 전기요금 때문에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감축 약속도 흐지부지되고 있다. 지금 오히려 누진제를 보다 강건하게 세우고 산업 부문 전기 소비의 근본적인 문제를 결단해야 할 시점이다. 홍준희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