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 '깃발지기' 없는 한국호


일본 에도시대에는 파괴 소방이 유행했다. 목조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 때문에 불이 번지는 방향에 위치한 집들을 미리 부숴 불길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어떤 집을 부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깃발지기'였다. 그는 망루에서 전황을 살피는 사령관과 같다. 동료들은 밑에서 눈앞의 불을 끄는 데 정신이 없지만 깃발지기는 지붕에 올라 바람의 방향과 세기, 지형과 집의 배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마지노선의 집' 위에서 깃발을 흔들어야 했다. 그의 판단이 동료의 목숨과 직결됐기에 그만큼 책임이 막중했다.

깃발지기는 리더의 역할이 어때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결단으로 구체적 목표를 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왕좌왕하는 사태를 막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최근 우리 수출이 절벽 위에 서 있다. 천금 같았던 중국 특수를 발판으로 그간 우리 경제를 이끌어왔지만 올 들어서는 6년 만에 최악의 실적으로 성장률을 갉아먹는 지경에 봉착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교역 감소로 우리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자위하기에는 주력 산업의 구조적 문제가 심각하다. 조선·해운·철강·석유화학 등 장치 산업은 과잉 공급에 직면해 구조조정이 절실하다. '기술력의 일본, 가격의 중국(넛크래커)'에 끼였다 했는데 이제는 '가격의 일본, 기술력의 중국(신넛크래커)'까지 더해져 설상가상이다.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뉴노멀'로 상징되는 구조적 저성장에 진입하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쏟아지는 장대비(경기 침체)만 용케 피하면 2~3년 뒤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진짜 걱정되는 대목은 상황이 이런데도 '깃발지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업 정책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정부, 법제화로 산업 재편을 도와야 할 국회까지 모두 그렇다. 민관 역할 분담, 유기적 지원 체계 등은 기대하기조차 버겁다. 경제부처 중심의 '기업 구조조정 협의체'는 조직 자체에 정권 차원의 힘이 실리지 않다 보니 장기적 관점으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기는 역부족이다. 이대로면 내년 총선 등을 앞두고 관료들의 치적 쌓기나 평판 관리의 경연장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국회는 더 가관이다.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은 재벌 특혜라며,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은 황사 등 지엽적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불임 정치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항상 '불판에서 뛰는 원숭이'와 같은 처지였다. 주위의 강대국 사이에서 매사 긴장하며 살길을 도모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런 때는 지도층이 소아에 사로잡혀 분열했다. 지금의 수출 위기, 경제 위기를 바라보면서 자꾸 드는 생각이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shle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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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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