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그라운드에서 전쟁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한진해운(117930)은 쓰러졌다”
한 해운업계 전문가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글로벌 대형 해운업체들이 우리 국적선사(한진해운·현대상선(011200)) 주 무대인 아시아-태평양 노선으로 진격해오자 한진해운은 싸워보기는커녕 가장 먼저 쓰러지며 길을 터줬다는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한진해운이 글로벌 시장에서 퇴출되는 상황에 몰리기까지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글로벌 1위 해운사 머스크라인(덴마크)과 2위 MSC(스위스)의 해운동맹 2M 결성과 파나마 운하 확장개통을 꼽는다.
머스크는 컨테이너선만 623척, MSC도 493척을 보유한 글로벌 해운업계의 ‘공룡’. 한진해운(98척)과 현대상선(60척)보다 6~10배 덩치가 크다. 2014년 결성된 2M은 초대형선박을 이용, ‘규모의 경제’로 운임 단가를 낮추며 경쟁하는 방식(치킨게임)으로 세계 해운 업황에 찬물을 끼얹었다. 2015년 40피트 컨테이너 1개(FEU)당 4,500달러에 육박했던 상하이발(發) 미 동부 노선 운임은 올해 1,500달러 수준으로, 상하이-미 서부노선 운임은 2,000달러수준에서 700달러대로 추락했다. 이 시기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부채비율을 낮추라는 정부의 압박에 배를 내다 팔고 빌린 배(용선)로 운항하고 있었다. 두 회사는 향후 업황이 개선돼 용선료가 더 뛸 것으로 보고 높은 가격에 계약을 맺었다. 상황은 더 악화됐고 당시 계약한 높은 용선료를 버티지 못해 한진해운은 법정관리로, 현대상선은 채권단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시장에서는 글로벌 치킨게임이 막바지가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한진해운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2M이 아시아-태평양 노선에서도 치킨게임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2M은 이미 아시아와 유럽, 대서양 항로를 장악하고 있다. 글로벌 해운시장 분석업체 알파라이너에 따르면 8월 기준 아시아-유럽 노선은 2M이 점유율 34%로 1위다. 반면 2M은 우리나라와 중국 등 동북아 국가선사들의 영향력이 강한 아시아-미주 시장 점유율 16%에 불과하다. 이 노선의 점유율 7%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한진해운이 소속된 CKYHE의 점유율은 37%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6월 미 서부와 동부를 잇는 파나마 운하 확장 개통은 2M에 기회가 됐다. 확장으로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은 기존 4,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에서 최대 1만3,000TEU급으로 확대됐다. 전 세계 선박의 97%가 파나마 운하를 이용할 수 있다. 운하가 개통되면 미 동부 항만에서 우리나라까지 약 45일 걸렸던 운항 기간이 최대 25일로 단축된다. 초대형 선박이 많은 2M에 유리한 셈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도 파나마 운하가 확장 개통되면 내년 개편될 글로벌 해운동맹 3곳(2M·오션·디얼라이언스) 가운데 2M의 수혜가 예상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파나마 운하 확장 개통으로 아시아와 미 동부 해안 노선의 주간 수송능력이 약 11.8% 확대되고 이 노선에 공을 들이는 2M은 주간 수송능력이 109.1% 뛸 수 있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머스크는 운하 확장 개통 후 1달도 안 된 지난 7월 이 시장에서 영향력이 있는 국내 국적선사 현대상선을 2M에 합류시키는 결정을 했다. 또 아시아-미 서부 항로인 TP8 서비스와 아시아-수에즈운하-유럽-미 동부 항로 TP11을 파나마 운하를 통해 연계하겠다고 발표, 8,500TEU급 선박 17척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중국과 싱가포르를 거쳐 미 동부로 가는 TP12 서비스 개선을 위해 8,500TEU급 선박 11척을 투입하고 상하이와 부산, 파나마 운하를 거쳐 미 동부로 가는 TP10 노선의 개선책도 내놨다.
한종길 성결대 동아시아물류학부 교수는 “파나마 운하 확장 개통으로 전 세계 항로의 변경이 불가피해졌고 기존 4개의 해운동맹(2M·CKYHE·G6·오션3)들은 각각 내년 3개로 재편해 ‘공룡’ 2M과 본격적인 태평양 노선 경쟁에 돌입하려 했다”면서 “하지만 한진해운이 가장 먼저 넘어갔고 유럽과 중국, 대만, 싱가포르 등 외국 선사들이 과실을 얻어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진해운이 넘어가면서 2M의 동(東)진은 더 빨라지고 있다. 2M 소속 머스크라인은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로 들어간 지 열흘도 안 돼 이달 15일부터 아시아(부산)-미국 서안 신규노선 TP1 서비스 개시, 4,000TEU급 컨테이너 6척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MSC도 5,000TEU급 6척을 아시아~캐나다 서안 신규 노선인 ‘메이플’에 투입할 예정이다.
공격적인 태평양 항로 공략의 핵심은 ‘동남아와 인도’다. 한국과 일본 등 동북아 주요 무역국의 경제성장률은 둔화하는데 베트남과 인도, 인도네시아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며 물동량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글로벌 물류업체 DHL은 지난 5월 2030년까지 세계 무역시장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무역은 50%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중에서도 중국과 인도, 베트남 물류는 2030년까지 10~12% 성장해 미국·멕시코·브라질(5~7%), 유럽(3~6%)을 압도할 전망이다. 임종관 한국해양대 교수는 “파나마 운하 확장으로 2M은 아시아-미 동부는 1만3,000TEU급, 아시아-미 서안은 2만TEU급 초대형 선박을 투입해 전 세계 시장을 완전히 제패하려 할 것”이라며 “2M은 미래 물류 중심 동남아와 인도를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 어디든 초대형 선박을 보낼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는 전략으로 가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 바다에서 초대형선박 전쟁은 앞으로 더 심화될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1만5,000~1만8,000TEU급 초대형선박 28척을 보유한 머스크는 1만9,000TEU 11척, 1만4000TEU 9척을 발주했다. 1만5,000TEU 이상 초대형선박 12척을 운항하고 있는 MSC도 1만9,000TEU 선박 10척을 용선할 방침이다. 이에 대응해 세계 3위 업체 CMA-CGM은 1만8,000TEU 3척, 2만TEU 2척, 중국 코스코도 2만TEU급 선박 17척을 발주했다.
한진해운을 법정관리로 보냈던 정부와 채권단의 고심도 이 부분이었다. 치킨게임이 길어지면 업황 개선도 확신할 수 없다. 당장 지원하더라도 적자가 지속되면 업황이 개선될 때까지 계속해서 혈세가 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해 결국 한진해운은 법정관리의 길을 걷게 됐다.
한종길 교수는 “글로벌 선사들은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일시적으로 운임이 뛴 상황을 틈타 운임을 깎아주는 방식으로 태평양 항로 고객들을 뺏어갈 것”이라며 “치킨게임에서 조금만 더 버텼다면 한진해운이 아니라 대만의 양밍, 일본의 K라인부터 무너질 수 있었는데 (법정관리) 시기가 너무나 아쉽다”고 전했다./세종=구경우기자 bluesquar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