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무너진 제방, 일산 침수





여물던 벼 이삭도, 자식처럼 키우던 젖소도 거대한 탁류에 잠겼다. 강둑이 터졌기 때문이다. 1990년9월12일 새벽3시50분, 행주대교 남쪽 1㎞ 지점. 닷새 동안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강물은 일산 제방을 무너뜨리고 기름진 평야를 삼켰다. 처음에는 50m 가량 무너진 제방은 순식간에 250m가 유실되며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과 지도읍 일대 83개 마을에 수마가 들이닥쳤다. 원당읍까지 일부 침수되고 파주군에도 물길이 차올랐다. 침수지역이 고양군 전체의 65%.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래 최악의 수재였다.


붕괴가 감지된 시각은 2시40분께. 비상근무에 들어가 제방구간을 순찰하던 육군 30사단 장병들에 의해서다. 부대원 9명과 함께 자정부터 순찰을 돌던 끝에 조그만 구멍 12개를 발견한 육군 30사단 91연대 1대대장 김상진 중령(당시 38세)은 긴급 보고를 올렸다. 군이 보낸 1개 대대 병력과 트럭 20대, 불도저 1대가 현장에 도착하기 직전, 흙탕물이 제방을 무너뜨렸다. 따뜻한 남국의 태양을 기다리던 농경지는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강물이 노도같이 들어오는 검은 새벽, 비극과 기적이 동시에 일어났다. 4만5,000여 지역주민들에게는 악몽이 따로 없었다. 목숨을 간신히 건졌어도 모든 것을 잃었다. 가재 도구와 가축을 잃고 수확을 앞둔 농사도 망쳤다. 인근 학교에서 뜬 눈으로 젖은 아침을 맞이한 주민들은 정부를 탓했다. 보수 건의를 수없이 묵살 당해왔기 때문이다. 한강 인도교 수위가 최고 수위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에야 공무원들이 비상점검에 나섰지만 때가 늦었다.

무너진 일산 제방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흙과 모래로 축조된 시설. 주민들은 해마다 강물이 불 때마다 불안에 떨었다. 기록적인 수도권 집중호우가 쏟아졌던 1984년에는 온 주민과 군 병력이 동원돼 밤낮없이 모래주머니로 제방을 메꿔 붕괴를 겨우 모면했었다. 주민들은 갈수기에 제방을 다시 쌓아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건설부와 경기도는 서로 책임을 떠밀며 부분 땜질에 그치다 대형 사고를 냈다.


충청북도과 경기도, 서울의 집중 호우는 천재(天災)라고 해도 일산제 붕괴만큼은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기에 주민들의 분노가 컸다. 각급 학교 등 주민대피소에는 ‘정부가 서울의 제방 붕괴 압력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일산제를 무너뜨렸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수해 복구 내내 지역 민심은 흉흉할 대로 흉흉해졌다. 라면 몇 상자 들고 ‘수해 현장을 위로차 방문’해 사진부터 찍는 일부 정치인에게 주민들은 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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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도 있었다. 인명 피해 사고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군이 발동한 조기 경보 덕분. 강가와 인접한 육군의 각급 부대는 호우가 내리자 비상순찰조를 편성해 강둑을 돌다가 붕괴 조짐을 상급 부대와 관청에 알려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군 순찰 병력이 작은 구멍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대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군은 수재민 지원과 제방 복구에도 앞장 서 오랫 만에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한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제방 붕괴 사흘 뒤부터 집으로 돌아온 수재민들은 다시금 피눈물을 흘렸다. 가재 도구는 사라지거나 못쓰게 돼버렸고 가축들은 모두 죽었다. 용케 살아남은 젖소도 며칠간 젖을 짜내지 못해 염증이 걸려 도축할 수 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신도시 건설 공사가 시작돼 마지막 추수라고 여겼던 농사를 완전히 망치고 빚만 남았다.

주민들을 더 열 받게 만든 것은 사후 처리. 경기도와 건설부는 책임 소재를 놓고 또 싸웠다. 건설부 장관은 국회의원들의 추궁에 ‘인재(人災)가 아니라 천재지변’이라고 답변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결국 일산제 붕괴의 책임은 건설부 장관과 홍수 판단 및 충주댐 수문 관리를 잘못한 것으로 지적받은 관선 충북지사가 해임되는 선에 끝났다. 피해 주민에 대한 보상은 융자금 몇백만원 대출에서 그쳤다.

인명 피해만 없었을 뿐, 을축년(1925년) 대홍수 이래 최악의 사태였다는 일산제 붕괴의 흔적은 이제 없다. 허술한 일산제방은 자유로 건설과 함께 높고 넓으며 튼튼한 제방으로 바뀌고 고양군 일대에도 거대한 아파트 숲이 들어섰다. 일산제 붕괴 이후 사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 피해 지역 일대의 산천은 못 알아보게 변했건만 재해는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1996년에는 연천댐이, 2006년에는 안양천 제방이 무너졌다. 또 다시 초가을. 요즘은 다른 재해가 찾아왔다. 여름내 사람들의 가슴을 타 들어가게 만들었던 4대강 녹조가 여전하다. 구조적 인재(人災)에 자연과 사람들이 멍들어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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